왜 사람을 찾는가, 기록이 있는데

두 줄이 만든 일의 얼굴

by 핑크 바게트

병가 통보 다음 날부터 알림이 울렸다.

알림음이 울릴 때마다 손끝이 먼저 떨렸다.

몸은 멈췄는데 마음은 여전히 달렸다.

그때 문장을 바꿨다.

전 직장은 내 것을, 현 직장은 당신의 것을 달라 했다.

둘 다 기록 대신 사람을 찾았다.

그래서 이번엔 사람이 아니라 문서를 가리켰다.


첫 답장, 두 줄.


"현재 저는 의료진 권고에 따른 병가 중입니다."

"업무 문의는 공유드라이브 SOP/Recipe 폴더를 확인해 주세요."


반복 요청을 대비해 둘째 세트도 정해 두었다.


"제가 맡던 영역은 문서에 표준화되어 있습니다."

"병가 기간에는 인수인계 및 추가 작업이 불가합니다."


죄책감 대신 원칙.

설명 대신 링크.

사과 대신 절차.


며칠 뒤 익숙한 요구가 왔다.


“레시피 파일 있어요? 생산 계획도 부탁해요. 발주 방식이랑 장비 위치, 재료 준비법도요.”


데자뷔였다.

전 직장은 내 것을, 현 직장은 당신의 것을 달라 했다.

이름만 바뀌었지 습관은 같았다.

그래서 이번엔 사람이 아니라 문서를 가리켰다.

나는 짧게 답했다.


“공유드라이브 Recipe v3.2 / SOP Production Plan 탭을 확인해 주세요.”


그때 또렷해졌다.

내가 두려워하던 건 ‘권위’가 아니라 '정돈되지 않은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그 허술함을 내 호의와 초과 노동으로 메우던 오래된 관성.

알림은 계속 쌓였지만, 나는 두 줄을 반복했고 대체자 지정은 매니저 권한임을 명확히 했다.


EI 승인이 떨어지자 비로소 숨 쉴 틈이 생겼다. 이후의 답장은 더 단순해졌다.


“병가 기간(YYYY-MM-DD ~ YYYY-MM-DD)에는 모든 인수인계가 중단됩니다. “

“운영 관련 의사결정은 매니저 권한이며, 자료는 SOP에 있습니다.”


감정은 뒤로, 구조는 앞으로. 호의는 남기되, 무한책임은 자른다.


마음이 늘 단단했던 건 아니다.

심사 기간엔 알림만 울려도 손끝이 떨렸다.

이게 복수심은 아닐까, 예의를 놓치는 건 아닐까 여러 번 검수했다.

결국 남은 건 원칙 하나였다.

문서는 누구의 감정도 상처 내지 않으면서 경계를 지킨다.


시간이 지나자 관성도 줄었다.

링크를 가리키면 다시 묻는 사람이 줄었다.

전화가 우선이던 방식은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사람을 우회로 삼지 않게 만드는 습관이 자리 잡았다.


시간이 좀 더 흘렀을 때, 내 폴더를 정리했다.

파일명을 날짜-버전으로 통일하고, 체크리스트를 덧붙였다.

그들을 위한 배려이자, 나를 위한 종료 절차였다.

사람 대신 문서를 남기고, 마음 대신 기준을 남겼다.


이번 장의 결론은 간단하다.

사람 대신 문서를 가리켜라.

호의는 남겨도, 경계는 남겨라.

그게 이번엔 나를 구했다. 그리고 아마 다음에도 그럴 것이다.



지금 당신을 가장 지치게 하는 건 ‘사람’인가요, ‘시스템’의 부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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