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상대 찾기부터 데이트까지 A to Z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들고 낯선 땅에 처음 떨어진 나는 캐나다의 연애시장을 탐험할 생각에 들떠있었다. 한국에서는 보통 연애를 어떻게 하던가? 주변인들에게 소개를 받거나, 학교나 직장에서 자만추를 하거나, 요즘은 러닝크루나 심지어 경찰과 도둑 게임 등에서도 다들 열심히 번호를 교환한다고도 들었다.
그러나 당장 연고도 직장도 없는 나로서는 주변에 부탁할 친구도, 자만추를 할 장소도 마땅치 않았다. 그러나 기다리기만 한다고 하늘에서 친구나 애인이 뚝 떨어지지는 않는 법. 나는 우선 밋업을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다. 밋업은 애인보다는 친구가 목적이었고 나처럼 막 밴쿠버에 도착한 사람들이 주로 나왔다. 거기서 나는 좋은 친구는 몇 사귀었지만 이후 연애감정으로까지 이어질만한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밋업에서 만난 친구로부터 의외의 추천을 받을 수는 있었는데, 본인도 지금의 배우자를 틴더에서 만났다며 내게 틴더를 추천해 줬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원나잇 어플이라는 인상이 강한 것 같지만 땅덩이가 넓어 자만추가 어려운 캐나다에서는 연애나 친구 교류 목적으로도 적극적으로 이용된다는 말과 함께.
그날로 틴더를 다운로드하고 열심히 스와이프를 시작했다. 한번 사진을 넘길 때마다 뜨는 각종 다른 인종들의 얼굴에 내가 외국에 나와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되었다. 터번이나 히잡을 쓴 사람을 틴더에서 보는 경험은 매우 이색적이었다. 모든 성별과 인종에 열려있는 나는 다양한 사람들과 매칭되었다.
내가 캐나다 연애 시장에 아주 살짝 발끝을 담갔을 때 만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었다.
캐주얼 원나잇 스탠드 상대를 찾으려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보통 본인의 목적을 숨기지 않고 적어놓는 편이다. 그 편이 상대방에게도 본인에게도 나으니까. 보통은 자기소개가 짧고 본인의 피지컬을 어필하는 사진을 많이 걸어놓는다.
진지한 스테디 데이트 상대를 찾으려는 사람들
이 사람들도 역시 진지한 만남을 원한다고 적어놓고, 자기소개가 좀 더 길고 자세하다. 사진들도 단순한 Thirst trap 보다는 본인의 일상 사진이나 심지어는 가족사진을 걸어놓기도 한다.
일단은 캐주얼한 데이트를 원하는데 롱텀에도 열려있는 사람들 (혹은 그 반대)
당신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스테디로 만날 가능성도 있지만 잘 모르겠어요- 부류. 당신만 진심이고 상대방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
아시안 여자만 찾으려는 외국인 남자들
아시안뿐만 아니라 모든 인종의 여성들에게 피버를 느끼는 남자들은 존재한다. 그러나 일단 나는 내가 아시안이기에 옐로피버 남자들을 몇 목격했다. 특정 인종이 섹시하다고 느끼는 것 자체는 있을 수 있지만, 문제는 그들이 어째서 인종에 대해 집착적인 환상을 품었는가 다. 그들은 동양 여성들 특유의 얌전하고 순종적인 스테레오 타입에 환장한다. 얼마나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고 남성성이 부족하면 그런 인종적 환상을 품을지 생각해 보라. 그들은 높은 확률로 당신에게 다른 인종(주로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자신의 인종) 여성들에 대한 험담을 하려고 시도하며 당신이 자신의 스테레오 타입과 어긋나게 순종적이지 않고 소위 ‘자아가 있는’ 모습을 보이면 매우 당황하거나 심지어는 분노한다.
아시안 여자만 찾으려는 아시안 남자들
이들은 캐나다에 살고 있지만 본인의 인종과 같은 여자들을 선호하며, 그들만 만나고 싶어 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맥락이 작용하는데, 보수적인 동양 문화권에서 부모의 압박에 의한 영향일 수도 있고, 혹은 아직도 마초이즘의 영향이 심한 서양 사회에서 남성성을 어필하기 어려운 동양인 남성의 특성상 타 인종에게 어필이 되지 않거나 (이는 바로 위에 언급했듯 동양여성들에게는 카운터 이펙트로서 ‘여성적인 동양 여자들’에게 피버를 품은 서양 남자들을 양산한다) 본인들이 타 인종 여성에 대한 두려움을 느껴 동양 여자만 찾는 부류다.
그 외 에이섹슈얼, 폴리아모리 등 특수한 연애관계를 찾는 사람들
성소수자들의 정체화와 가시화가 잘 되지 않는 한국에서는 만나기 힘든 타입인데, 본인들의 성향 (무성애, 다자연애)등을 미리 알려놓고 비슷한 성향자들을 찾는 사람들이다. 플라토닉 한 연애를 할 사람을 찾는 사람들 및 심지어는 커플이 본인들의 커플 사진을 올려놓고 같이 다자연애를 할 사람을 구하는 케이스도 봤다.
이토록 다양한 캐나다 연애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내가 무엇을 바라는 가를 정확히 해야 한다. 나는 단순 원나잇 상대가 아닌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연애를 할 사람을 원했고 그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우선적으로 한 번 필터링을 했다고, 그중에서 신중하게 오프라인 데이트 상대를 골랐다.
첫 데이트 상대는 큰 규모의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는 잘생긴 인도인 남자였는데, 나와 마찬가지로 이민자였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첫 만남부터 나에게 큰 레드 플래그를 선사했는데, 대뜸 나더러 영어를 잘한다며 저번에 일본인 여자랑 데이트를 했더니 영어를 한마디도 못해서 번역기를 돌려야 했단 소리를 늘어놓는 거였다. 매우 오만한 소리였지만, 한 번의 기회는 주자 싶어 다음번 데이트를 나갔더니 이번엔 자기 집에서 영화를 보자며 속이 뻔한 소리를 해댔고,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내 영어 문법 오류를 고치려는 등 이어지는 건방진 짓에 자연스럽게 정이 뚝 떨어졌다. 처음에는 당연히 내가 영어 네이티브 화자가 아니니 이걸 영어 실력 향상의 기회로 여겨야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입장을 바꿔 내가 만약 한국어 화자가 아닌 사람과 만남을 가진다면 그 사람이 요청하기 전에 마구잡이로 그 사람의 문장을 고쳐주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얼마나 오만한 짓인지 알 수 있었다.
또한 나는 그의 말투에서 묘하게 본인을 항상 피해자로 포지셔닝하고 상대방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가스라이팅을 하려는 태도를 읽을 수 있었는데 (특히 본인 집에서 영화를 보자는 요청을 거절했을 때 등), 그게 머릿속에서 알람을 크게 울려서 결국 두 번째 데이트 이후로 연락을 끊었다.
그 후 아니나 다를까 인스타 디엠으로 찾아와 왜 본인에게 노력하지 않냐며, 나는 노력하는 여자가 취향이라고 말했을 텐데? 이 지랄을 떨기에 재수 없는 새끼 다시는 나한테 연락하지 말고 꺼지라는 장문의 문자를 보내고 차단했다. 저 때마저도 ‘내’가 ‘본인’에게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고 나쁜 너와 착한 나 포지셔닝을 하려는 속셈이 뻔히 보여서 잘 걸렀다 싶었다.
저 때의 경험에 너무 열이 받아서 다시는 캐나다에서 남자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으나 이미 두 번째 데이트 상대가 잡혀있기에 약속에 나갔다.
두 번째 상대는 마찬가지로 남자인 캐내디언이었다. 첫 데이트를 다운타운에서 만났는데, 다운타운을 좀 아냐니까 어느 정도는 안다고 답했다. 간단하게 저녁 식사 겸 술을 마시기로 하고 다운타운을 돌아다니다가 본인이 아는 식당이라며 레스토랑에 나를 데려갔는데, 그냥 레스토랑이 아니라 아주 아주 아주 비싼 고급 스테이크 하우스였다. 메뉴를 보니 가장 싼 애피타이저도 3만 원에서 5만 원을 그냥 넘어가는 식당이었고, 스테이크에는 가격조차 쓰여있지 않았다. 가장 비싼 와인은 한 병에 천만 원이라고 적혀있어서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했다. 사실 이 남자는 아주아주 부자여서 처음 만난 나에게 25만 원짜리 스테이크와 천만 원짜리 와인을 사주려는 거였다.
라는 해피엔딩이면 좋겠지만 당연하게도 나는 내 앞에서 메뉴를 펼쳐 든 남자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하얗게 질리는 걸 볼 수 있었다. 이 자식, 사실 잘 모르는데 아는 척 들어왔구먼. 앞에서 종잇장 얼굴이 된 남자를 모르는 척하고 500불어치 밥을 뜯어먹을 철판이 있지는 않아서 그냥 사실 배가 별로 안 고프니 애피타이저만 먹고 위스키 같은 거나 마시러 가자고 운을 띄우자, 죽다 살아난 사람처럼 남자의 혈색이 돌아왔다.
이후 이어진 대화는 생각보다 정말 재밌었다. 캐나다 동부에서 나고 자랐지만 음악을 하고 싶어서 인디 씬이 활발한 밴쿠버에 왔고 (젠장, 또 예술가다.) 동양인과 데이트해보는 건 내가 처음이며 케이팝은 한 번도 들어 본 적도 없어 BTS 블랙핑크도 몰랐다. 나는 한국의 좋은 록 밴드들을 몇 추천해 주고 서로 좋아하는 밴드에 대한 이야기를 오래 나눴다. 계속 내 영어를 고치려고 해 자존감을 떨어트리던 앞선 인도 남자와 달리 이 캐내디언은 한 번도 내 영어를 지적하지 않았고 중간에 혹시 내 말이 알아듣기 어렵지 않냐고 하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전혀 문제가 없다고 답했다. 오히려 내가 방금 막 캐나다에 도착했고 일상 속에서 영어를 써보는 게 태어나 처음이라고 하자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재밌는 대화를 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리고 그 남자와는 이후 일 년에 한 번 기념일마다 그 첫 데이트 때의 비싼 스테이크 하우스에 가는 게 우리만의 기념일 전통이 되었다.
나는 캐나다 연애 시장을 탐험할 생각에 아주 들떠있었는데. 하키 선수도 만나보고 싶고 캐나다 여자들도 만나보고 싶었는데. 결국 두 번째로 만난 사람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럴 생각은 없었으나 몇 가지 결정적 요인들이 있었다.
우선 나는 웃긴 편이다. 한국에서 예능 피디였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문제는 내 데이트 상대들도 웃긴 나를 좋아헀지, 나를 웃겨줄 만한 사람은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데이트를 할 때마다 매번 광대노릇을 하는 일에 지쳐있었는데, 이 캐내디언은 유머감각이 매우 좋았다. 엉뚱한 소리나 이상한 농담을 자주 하는데 그게 내 스트라이크 존을 매번 적중했다. 이 정도로 나를 웃기는 남자는 처음 만나봤다. 주로 관계를 처음 시작할 때 잘 보이고 싶어서 딱딱하고 격식 차리는 나를 같이 유치한 장난을 치고 이상한 표정을 짓게 만드는 게 좋았고, 둘째는 성격이 매우 순하고 착한 편이어서 불같고 장부 스타일인 나와 궁합이 좋았다. 또한 그의 열린 마음도 한몫했는데, 두 번째 데이트에 내가 저번에 추천해 준 실리카겔과 자우림 앨범들을 여러 개 듣고 와서 매우 좋았다며 긴 후기를 들려주었고 내가 먹자고 하는 생소한 아시아 음식들에 매우 열린 마음으로 참여했다. 2년이 지난 지금 그의 최애음식은 물회와 막국수다. 매일매일 눈뜨면 오늘 무슨 음식 먹을지부터 생각하는 나로서는 영원히 치킨너겟만 먹어야 하는 백인 남자와는 절대 연애할 수 없기에 이 부분이 생각보다 매우 컸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으로는 진보적인 캐나다에서 나고 자라서 그런지 한국에서는 매우 급진적인 편에 속했던 나의 사상과 많은 부분의 결이 맞아떨어졌다. 여성, 장애인, 소수자, 정치 등 다양한 의제에서 궤를 같이했고 이건 내가 사람을 고를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키 팩터였다. 전 애인들은 이러한 정치의제에 아예 무관심하거나 내가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캐나다인이라면 다들 그런가? 싶기도 했으나 의외로 최근 캐나다의 젊은 층 보수화가 많이 진행되어 이후 만나본 그의 친구들은 다들 보수적인 편이어서 이런 사람을 만난 게 운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데이트 초반엔 서로를 많이 의심했다. 애초에 이 남자는 캐주얼한 관계를 원한 거였고 나는 스테디를 원했다. 나는 이 사람이 혹시 옐로 피버는 아닌가, 그 남자는 그 남자대로 내가 영주권을 위해 자기를 이용하려는 건 아닌가 서로 가는 눈을 뜨고 의심하던 때가 있었다. 그 의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전부 오해였을까? 아니면 어느정도 사실이어서 헤어졌을까? 뒷 이야기에서 확인하시라.
그동안 다른 똥차 애인들을 거쳐오면서 '이것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필터들을 분명히 설정한 게, 같은 나라에서 같은 말 쓰는 같은 인종들과도 실패한 장기연애를 오히려 낯선 이국에서 다른 말을 쓰고 다른 문화에서 자란 외국인과 처음 해보게 된 이유이자 관건이었던 것 같다. 나처럼 모르는 땅에서 누군가를 찾는 사람이 있다면 급한 마음에 아무나 덥석 주워 들지 말고, 나 자신과 자꾸 타협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물론 이렇게 잘 맞는다고 해도 항상 즐겁고 행복한 연애만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차이로 인해 많이 싸우고 화해하기도 하며 국제연애만의 예상치 못한 장애물이 있는 순간도 있다. 이 이야기는 다음 편에 이어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