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금희 아나운서가 쓴 공감에 관하여를 읽고 있는데 책 중에서 " 미스 리라고요? " 챕터에서 눈길이 멈췄다. 글자 사이로 30년 전, 낯선 도시, 공사 중인 건물의 서늘한 공기와 여기가 내가 근무할 곳인가 설레고 앳된 나의 신입사원 시절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책에서 작가는 직장 내에서 여성들에게만 있는 차별적인 요소를 언급했다. 그중 하나가 호칭 문제였다.
유독 여사원에게만 미스 ~라고 불렀던 것은 직장 내에서 여성의 위치를 아래로 보거나 단순히 보조 역할로 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애초부터 존중의 의미가 빠져 있다는 것이었다.
1990년대, 졸업장을 받기 전인 4학년 2학기에 나는 사회라는 거대한 파도에 몸을 실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른 취업은 시대를 잘 만난 탓이기도 했다.
도심의 번화가에서 비껴난 변두리에 증축 공사 중인 건물이 나의 첫 발령지였다.
'교환 전송과'라는 생소한 이름의 부서에 발령받은 유일한 여직원이 바로 나였다.
나랑 같은 부서에 발령받은 남자 동기도 여럿 있었다. 혼자 신입이었으면 더 힘든 상황이었겠지만 동기가 많아서 든든한 마음도 있었다.
교환 전송과 가 생긴 이래 여직원의 존재는 내가 처음이라 과장님을 비롯한 실장님과 팀원들은 다들 친절하게 업무를 가르쳐 주셨다.
하지만 팀원들과 업무가 익숙해질수록 거슬리는 문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생겨났다.
바로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켜온 J 주임이 나를 부르는 호칭 문제였다.
그는 늘 나에게 '미스 정'이라고 불렀고, 기분에 따라서 '정양'이라고도 불렀다.
함께 입사한 동기들에게는 oo야, oo 씨라고 부르면서 나에게만은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미스 정','정양' 그 호칭이 귓가에 머물 때마다 나는 속상했다. 분명 남자 동기들과 같이 정식 공채를 거쳐 들어온 구성원이었지만, 이름이 아닌 '미스 정'으로 불리는 순간은 전문성을 가진 직원이 아니라 더 가벼운 존재, 혹은 그 시절 다방에서나 불릴 법한 존재가 된 기분이었다.
호칭 속에 '존중'이 빠져 있다는 것은 나는 풋내기 신입사원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한동안 그 호칭을 견디다 어느 날 나는 J 주임에게 말했다.
" 주임님, 왜 자꾸 저를 정양이나 미스 정이라고 부르세요? "
나의 질문에 당황한 J 주임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 그럼 뭐라 불러? 여직원이 있어봤어야 어떻게 대하는 줄 알지."
J 주임의 의외의 답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건 악의가 아니라 무지였다. 낯선 존재를 어떻게 환대해야 할지 몰라서 나온 선배의 태도일 뿐이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J 주임에게 말했다.
"그냥 다른 동기들처럼 제 이름을 불러주세요. 저 정양이라고 불리는 거 너무 싫어요"
J 주임은 놀란 표정이었지만 흔쾌히 알겠다고 말했다.
다음날 아침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J 주임은 보란 듯이 내 이름을 크게 불렀다. 장난 섞인 외침이었지만, 나를 대등한 동료로 인정하겠다는 화해의 제스처임을 알 수 있었다. 그날 이후 내 이름은 부서의 공기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누군가 타 부서에서 나를 다시 미스 정이라고 부르면 J 주임이 나서서 이름을 부르라며 대신 말해주기도 했다.
첫 발령지는 호칭뿐만 아니라 여성차별적인 일은 많았다. 타 지점에서 전화가 오면 무조건 남자 직원을 바꾸라는 말도 그렇게 듣기 싫었다. 담당이 나인데 무조건 남자 직원을 바꾸라고 했다. 이 문제도 동기들에게 이야기했더니 알아서들 소문을 내주어 남자 직원만 찾는 전화는 줄어들었다.
여직원이라서 이름이 아닌 미스 정이나 정양이라고 불리는 것은 참 불쾌한 일이지만 난생처럼 마주한 여직원을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모르는 남자 선배도 있음을 난 그때 알게 되었다.
호칭이 마음에 안 든다면 당당히 제대로 된 호칭으로 불러달라고 이야기해야 한다.
이후 난 그 지점을 떠나 서울로, 분당으로, 수원으로 부서를 옮겨가며 열심히 일했다.
더 이상 미스 정이라고 불리지도 않았지만, 결혼과 함께 미스 정이라는 꼬리표도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간 탓이리라.
숨겨진 불쾌함을 삼키고만 있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해서 알려주어야 한다.
책 한 권으로 추억여행을 할 수 있었다. 이제는 호호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J 주임과 나의 첫 사수들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부디 건강하고 무탈하게 잘 지내시고 계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