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 채집을 하려고 했던 6월 9일 새벽.
새벽에 한 피검사 결과가 나올 즈음 갑자기 여러 의료진들이 다급하게 몰려왔다. 여러 번 아이 상태를 체크하고는 산증이 심하다며 산소를 올렸다 내렸다 난리였다. 갑자기 무슨 일인지 파악도 하기 전에 의료진은 점점 늘어나고 급 중환자실에서 양압기까지 빌려와 아이의 입에 물리려고 하였으나 순식간에 산소포화도가 후드득 떨어지면서 양압기도 물려지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자는 듯 누워있던 아이인데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난밤 아이가 유난히 깊이 자서 나도 이 병원 옮기고 처음으로 깊은 잠을 자긴 했었다.
여튼 아이는 급히 10명 가까운 의료진에 의해 처치실로 옮겨졌고, 이동하는 중 산소포화도가 50 이하로 떨어지며 cpr(심폐소생술)을 부르는 상황까지 갔다가 아슬아슬하게 돌아왔다. 골다공증이 심한 아이라 cpr을 하다가는 뼈가 다 부러져 더 고통이 심할 거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그런 상황이 오면 거부할 생각이었는데 다행이었다.
그런데 위기는 넘겼지만 자발 호흡이 안된다고 했다.
'산소 10리터 쓰고 있지만 내 눈앞에서 아직 숨 쉬고 있는데??'
호흡이 안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알아들어야만 했다.
'이상태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며 인공호흡기를 물려볼 수는 있지만 회생 불가합니다. 그래도 강제로 인공호흡기를 물려 중환자실에 보내겠습니까?'
또 물었다. 딱 한 달 전 중환자실에서 들었던 질문이었다.
"아니요. 안 할래요. 이제 방법이 없잖아요."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지며 아이에게 붙어있던 10명 가까운 간호사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car-t가 마지막 방법이었다. 척수 항암 불가, 이식 불가, 고용량 항암 불가한 상황에서 방법이라곤 car-t 뿐이어서 돈 내고 약 만들다가 안 좋아져 주입 못해도 좋으니 제발 세포 채집만이라도 하게 해달라고 주 교수님께 울며 매달려서 얻은 마지막 기회였다. 백혈구수도 부족해 여러 번 뽑아야 할 수도, 심지어 이 컨디션으로는 뽑다가 잘못될 수도 있는 상황이어서 유교수님은 반대하셨었고 주교수님이 고집부려 얻은 기회인 듯했다.
그래서... 세포를 뽑을 수 없어져버린 이 상황은 나에게
"이제 그만할 때야."
하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릴 뿐이었다.
사람들은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드라마일 뿐이라고, 세상에 그런 의사는 없다고들 하지만 아이 치료하는 7년 동안 나는 드라마의 주인공들 이상으로 친절하고 이타적이며 최선을 다하는 의사 선생님들을 너무도 많이 만났다. 환자가 아이여서인지, 우리가 너무도 끈질겨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쪽 선생님들은 포기란 걸 모르는 듯했다. 아이가 이지경(?)이 되도록,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아무도
"안 되겠습니다. "
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머리로 간다는 보고가 별로 없지만 이 약이라도 써봅시다.",
"지금은 이게 최선입니다."
하며 그 와중에 방법을 만들어와서 무엇이든 해주었고, 안 되는 걸 알지만 내가 조르면 대부분 해주었다.
이 와중에도 그분들은 어떻게든 무의식 속에 연명이라도 할 방법을 찾아올 분들이라 누군가는 이 상황을 끊어줘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신랑에게 연락하고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는 사이 주교수님이 오셨다. 여러 말이 오갔지만 내가 했던 말만 기억난다.
"만약에 아이를 보내야 한다면 아프지 않게 보내주고 싶었는데, 지금 아프지 않아 보여요."
교수님도 말없이 끄덕이셨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라 아이와 인사를 못하는 게 큰 슬픔이지만 굳이 잠시라도 아이를 깨워 고통스러운 상태로 만들어 인사하고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삽관을 하고, 결국에는 목에 구멍을 뚫었다가 폐렴이 오고 중환자실밖에 나와보지도 못하고 그렇게 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그게 그동안 고생한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라고 생각해 왔었다. 아이는 작년부터 몸이 심하게 안 좋을 때마다
"엄마는 정말 좋은 엄마예요. 엄마가 내 엄마여서 다행이에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하며 인사 아닌 인사를 마구 던졌고 그때마다 나도
"은찬이도 최고의 아들이야. 엄마도 은찬이 엄마라서 행복해. 엄마 아들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하며 인사 아닌 인사들을 급하게 던지곤 했었다. 그래서 우리는 굳이 지금 인사를 다시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잠시 후.. 신랑과 둘째가 도착했고 상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신랑도 곧 동의했다. 연명치료 거부 동의서에 사인을 했다. 절차라고 했다. 신랑이 전체 거부에 사인하려 하기에 혈소판 수혈은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백혈병의 경우 수혈까지 중단하면 혈소판이 금세 0이 돼버릴 테고, 그렇게 되면 아마도 매우 보기 힘든 상태로 보내게 될 것이기에 혈소판만큼은 계속 달라고 했다. 그러기로 하고 우리는 아이 주위에 둘러앉았다.
연명치료 거부까지 해놓고도 신랑은 수시로 주교수님을 찾아가 정말 방법이 없겠냐고 졸랐지만 원하는 답은 듣지 못하고 오는 듯했다.
소아암 병동에는 이별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없다. 보통은 중환자실이나 1인실에서, 운이 나쁘면 처치실에서 보낼 수도 있다. 보통 그렇듯 병실은 꽉 차 있었고 그래서 몇 시간이나 처치실에 있다가 어렵게 마련한 2인실로 자리를 옮겼다. 옆자리는 비워주었다.
의식은 없어도 어쩌면 다 보고 듣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손을 꼭 잡고 팔다리며 얼굴을 열심히 만졌다. 사랑한다고 미안하고 고맙다고 수없이 얘기하며 애써 침착하게 휴대폰에 있던 동영상들을 틀어 귓가에 들려주었다. 아이의 바이올린 연주와 우리 가족 목소리가 담긴 동영상들을 모두 듣고, 아이가 좋아하는 음악들을 틀어놓았다. 어릴 때부터 잘 때마다 자장가처럼 듣던 이루마 음악들을 쭉 틀어주었다.
혈압과 산소포화도 등 여러 가지를 계속 체크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오래 같은 상태를 유지했다.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하루 이상 걸릴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주교수님도 혹시 있을 기적을 바라시는지 가끔씩 와서 아이가 움직이거나 동공 변화가 있지는 않았는지 물었다. 뇌 문제라는 게 거의 확실할 만큼 눈꺼풀을 들어 올릴 때마다 터질듯 벌겋게 부어올라있는 눈동자가 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아이가 힘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은찬아 이제 그만 가. 안 아픈데로 가. 어디 안 보내고 집으로 데려갈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
여러 번 말했지만 아무 반응 없기에 정말 못 듣나 보다 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길어지자 둘째 녀석은 점점 지루해했다. 5학년이면 알 것 다 알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빠가 이제 곧 떠난다는데 심심해하다니... 결국 오빠 아이패드를 쥐어주었다.
그 와중에 둘째 녀석 밥은 먹여야 하고 코로나 때문에 병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건 나뿐이어서 지하 매점에 내려갔다. 오늘내일이면 내 새끼가 죽는데 나는 그 와중에도 먹을 것과 커피를 사고 있다니... 현실이 현실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임종이 내 새끼 임종이라니... 어이없는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신랑의 강요에 못 이겨 죽어가는 아이 옆에서 커피를 마시고 삼각김밥 몇 입을 목구멍에 쑤셔 넣었다. 치료는 중단했지만 혈소판과 해열제, 항경련제는 계속 들어갔다.
시간이 길어져 밤이 깊었다. 둘째 녀석을 옆 침대에 재우고 우리는 돌아가며 보조 침상에 몸을 뉘었다.
우리가 돌아가며 잠을 청하는 동안 아이는 아무 변화 없이 기다리고 버텨주었다. 다음날 오후까지도 아이 상태에 큰 변화가 없었다. 글로 읽었던, 임종기에 생긴다는 변화도 없었다.
"그만 가라."
아무리 말해도 안 듣기에 말 잘 듣던 녀석 마지막엔 고집을 부리는구나 했다. 그래서 아이 옆에 기대 누우며
"그래 이제 가라고 안 할게. 너 있고 싶을 때까지 있다가 가고 싶을 때 가~"
했더니 갑자기 아이 몸에 연결되어있던 모니터가 요란하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다들 벌떡 일어나 아이 옆에 딱 붙어 앉았다. 일단 둘째 녀석 놀랄까 봐 내 뒤에 붙여 세우고는
"무서우면 보지 않아도 돼."
하고 한 손은 딸 손을 잡고 한 손은 아들 손을 꼭 잡았다. 곧 모니터에 뾰족뾰족하게 그려지던 선은 일자로 멈추어 섰다. 옆에 있던 주교수님은 시계와 모니터를 번갈아 확인한 후 작고 떨리는 목소리로
"차은찬. 6월 10일 오후 2시 53분 사망하였습니다."
사망선고를 했다.
"이제 마스크는 빼도 되죠?"
몸에 달린 불편한 것들부터 모두 빼주고 싶었다. 핏기 있던 입술도, 열이 있어 유난히 발그레했던 얼굴도 순식간에 하얗게 변했다.
"어떻게 해. 좀 전까지 빨갛게 예뻤는데... 왜 이렇게 되는 거야."
나도 처음 겪는 일이라 잠시 놀라다가 딸이 놀랄까 봐 걱정이 되었다.
"희원아 오빠 심장이 멈춰서 핏기가 없어졌는데 그래도 희원이 오빠야. 무서우면 보지 않아도 되는데 이게 오빠 마지막 모습이니까 지금 안 보면 후회될 수도 있어."
하니 한참 후에야 오빠 쪽으로 오는 아이. 잠시 놀라 뒷걸음쳤다가 이내 용기 내어 오빠 옆에 앉아 오빠 손과 발을 주무른다.
그 사이 교수님은 아이의 히크만 카테터를 제거하려 애썼다. 그런데 아무리 힘을 써도 히크만이 빠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래 가지고 있다 보니 유착돼서 안 빠지는 모양이에요. 완전히 제거는 못할 것 같고 그냥 관만 자르고 봉합하겠습니다."
하고는 몇 바늘 꿰매 주셨다. 그 사이 양가와 가까운 몇 명에게만 연락을 했다.
이송 직원은 몇 시쯤 오게 할까 묻기에 한두 시간 정도만 시간을 달라고 했던 것 같다. 다시 아이 옆에 둘러앉아 핏기 없지만 아직은 따뜻한 아이를 만져댔다.
신랑이
"이제 못 안아볼 텐데 한 번씩 안아보자."
하며 아이를 안고는
"미안해. 그동안 수고 많았어."
하고 내려놓았는데 아이 표정이 웃는 얼굴이 되었다. 분명히 좀 전까지 무표정이었는데...
녀석.. 아빠한테 수고했다는 소리가 듣고 싶었나 보다.
시간은 흘러 이제 내려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저승사자같이 생긴 이송 직원이 와서는 무표정하고 예의 없는 태도로 아이를 하얀 천에 싸서 꽁꽁 묶는다.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여 신랑이 같이 도왔지만 아이는 짐짝처럼 스텐 트레이에 실려 침대에 올려졌고 거기에 고정되어 지하통로로 내려갔다. 아이는 구급차처럼 생긴 이송차량 뒷좌석에 실려졌다.
문득 구급차를 탔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는 아이 걱정에 연신 뒤돌아보며 상태를 확인하느라 바빴는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은찬아, 엄마 그동안 너 때문에 용기내고 힘내며 살 수 있었는데 이제 엄마 혼자 어쩌지?'
하는 생각을 하는 사이에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아이는 마침내 TV에서나 보던 냉장창고에 넣어졌다. 그제야 실감이 나며 심장이 터질 듯 아팠다.
'은찬아 우리 이제 진짜 헤어지는 건가 봐. 안녕'
그렇게 인사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