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마지막 힘

by 이보연
약이 허가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아이는 힘든 와중에도 밝게 웃었다.


2021년 3월 5일.

드디어 기다리던 약이 허가가 되었다. 허가가 되면 뭔가 쭉쭉 진행될 줄 알았는데 한 달이 지나도록 약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세포치료제'이다 보니 병원에서 세포를 채취할 수 있도록 세포 취급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이에 관한 승인들이 계속 늦어졌고 국내에서 유일하게 승인을 받은 병원에서조차 약가가 정해지지 않아 사용할 수 없다고 했다. 당장 아이는 죽을힘으로 버텨내고 있는데 대체 뭘 그렇게 협의하고 허가할 게 많은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약이 필요한 생명들이 얼마나 위급한 상황인지 아무도 모르는 건지 답답하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분노를 느끼면서도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시달렸다. 허가가 된 약인데 왜 사용할 수 없는 것인지 아무리 이해를 할래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이가 계속 힘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에 있는 동안 조금씩 재활운동을 하려고 애썼고 안 보이는 눈으로, 떨리는 손으로 글씨 연습을 했다. 아빠 퇴근시간을 기다렸다가 네 식구 모이는 시간이 되면 눈이 안 보여도 할 수 있는 윷놀이를 하곤 했다. 보드게임을 좋아하는 아이가 눈이 안보이게되자 할 수 있는 것은 윷놀이 뿐이었다. 힘겹게 윷을 던지고 말판을 제대로 볼 수 없으면서도 아이는 껄껄 웃으며 게임을 했다.


그렇게 지내던 4월 어느 날... 염증이 오르면서 열이 나서 응급실을 통해 입원했다. 주초에 외래로 찍어두었던 mr결과가 안 좋다고 했다. 한 달 전쯤 CT를 찍었을 때도 이상이 없었고 오히려 안 좋은 부분들이 작아지고 있던지라 안심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 머리에 그리 작지 않은 덩어리가 두 개나 생겼다. 저 덩어리가 한 달 만에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를 이미 봤기에 너무나 두려웠다.

기다리는 약은 아이의 세포를 채취해서 한 달 동안 배양해 만들어야 하다 보니 아이의 컨디션만 고려해도 촉박한 시간이었는데 여전히 국내 어느 병원에서 가장 먼저 할 수 있게 될지, 아이의 상태를 보고도 기꺼이 그 병원에서 받아줄지, 세포를 채취하고 약이 만들어지기를 기다리는 한 달 동안 아이가 잘 버텨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어서 더더욱 두려웠다. 그동안처럼 항암치료를 하면서 기다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세포 채취를 위해서는 항암치료나 스테로이드 사용도 중단해야 했는데 약을 언제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항암치료를 중단하는 것은 매우 무모한 선택이었지만 아이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보니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너무 두렵습니다.
제게는 너무 소중한 아이입니다.
12년 짧은 삶 중에 7년을 병원에서 살아온 내 새끼..
car-t 만 하면 된다며 그것만 생각하며 악착같이 버티고 있는 아이가 너무 불쌍해요.
꼭 살려야 하는데... 너무 두렵습니다...

-그날의 일기 중에서...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5월 첫 주면 국내 두 병원 중 한 곳에서 치료가 가능할 것 같다고 했다. 그때까지 항암치료를 멈추더라도 머릿속에서 자라나는 백혈세포들을 멈추게 할 방법이 필요했다. 생각나는 건 지난번에 효과가 좋았던 '감마나이프' 뿐이었다. 신경외과 교수님을 잡고 무조건 울며 매달렸다.

"그동안 많이 도와주신 거 아는데 한 번만 더 도와주세요. 은찬이 다음 달에 전원을 해야 해서 시간이 많이 없어요."

교수님은 특유의 '아이고~'하는 한숨을 내쉬시고는

"합시다. 다음 주로 잡아봅시다. 틀쓰고 해야 해서 또 힘들겠지만 또 해봐야지 어쩌겠어요."

하시는데

'살 수 있겠구나.'

온몸에 힘이 풀리고 부들부들 떨렸다.


그 다음 주, 아이는 또 그 무지막지한 틀을 쓰고 감마나이프 시술을 했다. 4시간이나 해야 하는 긴 시술이었지만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이 시술로 한 달만 버텨주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마냥 치료를 기다리는 동안 아이는 머리가 점점 더 아파져 마약성 진통제를 늘려가고 있었고 결국 골수 재발까지 되고 말았다. 믿고 기다리던 5월이 되었지만 어디에서도 치료는 가능하지 않았다. 아이가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는데 여전히 아무도 서둘러주지 않고 있었다.

아직 죽지 않았는데... 살아있는데.. 살릴 수 있는데...

동동거리는 것은 당사자와 의료진들 뿐이고 약을 승인하고 허가하여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그 누구도 서두르지 않고 있었다.

"엄마, 킴리아 승인이 되었다면서 왜 아직도 못써요?"

묻는 아이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다.

'엄마 아빠가 아무 힘이 없어서 미안해.'

그 생각뿐이었다.


너무 고통스러워 보이는 아이에게 물었었다.

"은찬아, 너무 힘들면 우리 그만하고 집에 갈까?"

무슨 뜻인지 이해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은찬이는 크게 고개를 저으며

"끝까지 할 거예요."

나에게 말했다.


점점 상태가 안 좋아지긴 했지만 어린이날이었던 5월 5일까지만 해도 말도 하고 동생이랑 통화도 했었는데 다음날부터 컨디션이 급격히 떨어지며 말수도 줄고 거의 잠만 잤다. 어찌해야 할지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좌절스러운 그 순간, 다른 병원에서 곧 채취가 가능할 것 같으니 바로 전원을 오라는 연락이 왔다. 엉엉 울며 무슨 정신으로 짐을 싸고 구급차를 탔는지도 모르겠다. 담당교수님은 손을 잡고 말없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셨고, 아이를 예뻐해 주셨던 간호사 선생님들은 병원 입구까지 따라 나와 눈물을 훔치셨다. 기쁨의 눈물이고 희망의 눈물이었다.


병원을 옮긴 다음날..

아이를 맡아주기로 한 교수님을 처음 뵈었다. 아이의 상태가 생각보다 안 좋아 당황스럽다고 하면서도 어쨌든 최선을 다해보자고 하셨다. 빠르게 각종 검사를 하는 동안 아이의 상태는 빠르게 안 좋아졌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스스로 약조차 삼키지 못하며 아프다는 표현도 못한 채 끙끙 신음소리만 낼 뿐이었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모습에 나조차도 당황스러웠다.

새벽에는 갑작스럽게 산소포화도마저 떨어지는 응급상황까지 왔다. 교수님은 머릿속에 백혈세포가 퍼지며 나타나는 반응인 것 같다고 며칠 후 세포 채취를 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으니 당장 고용량 항암치료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바로 세포 채취를 하려고 일부러 항암제도 다 끊고 몸 만들어서 왔는데 며칠을 남겨놓고 다시 항암치료를 하자니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세포 채취를 해놓고 항암치료를 하면 안 되겠냐고 우겨봤지만 제약회사에서 보내주는 팩에 세포를 담아야 하는데 그 팩이 아직 미국에서 오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왜 다른 팩에 담으면 안 되는 것인지 일반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아이의 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항암치료를 중환자실에서 해야 할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어서 일단 아이를 중환자실에 보냈다. 중환자실에 보낼 때마다 엄마쟁이 아들, 엄마랑 떨어져 힘들어할 것이 걱정이었는데 이번에는 엄마를 찾을 의식마저 없으니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어 다행인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다음날 오전,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아이 호흡이 많이 불안정한 상태이고 아직까지는 산소를 더 줄 여지가 있지만 그걸로도 부족해지면 삽관을 해야 하는데 폐의 문제로 삽관을 하는 거라면 회복의 여지가 있으나 은찬이처럼 뇌 문제의 삽관이라면 제거는 거의 불가능할 거고 그렇게 되면 아이가 너무 고통스러워질 거라며 만약 그런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할지 미리 결정을 해달라고 했다. 기관삽관은 오래 유지할 수 없어 결국 기관절개를 하게 되고, 그 상태로 억지로 연명하다가 결국에는 중환자실에서 폐렴으로 떠나게 되는 다른 아이들의 과정을 봐왔기에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신랑과 잠시 정말 많이 울며 그간 너무 고생한 아이를 더는 고생시키지 말자고 만약 그런 상황이 오면 삽관은 하지 않기로 했다. 신랑은 애엄마 면회 한 번만 하면 안 되겠냐고 부탁을 했고 특별면회를 허락받아 오후에 아이를 보러 들어갈 수 있었다.

아이는 처참했다. 코에는 엄청난 크기의 호흡기와 콧줄이 끼워져 있었고 열 때문에 옷도 다 벗겨놓은 채 차가운 얼음 매트 위에 눕혀져 있었다. 팔 여기저기는 시커먼 멍투성이에 혈소판이 낮아 잇몸에서는 피가 계속 나고 있었다. 엄마가 만지고 주무르고 얘기해봐도 미동도 없는 아이. 엄마엄마 울면 이런저런 얘기라도 해줄 것을... 생각해간 얘기들은 하지도 못한 채

"엄마가 미안해. 미안해."

만 반복하다가 나왔다.


고생시켜서 미안해.

그런데도 힘내라고 해야 해서 미안해.

그만 힘내고 가라고 못해줘서 미안해.


4일 동안의 항암치료가 끝났지만 아이의 상태는 변화가 없었다. 몸의 움직임은커녕 동공 변화조차 없다고 했다. 회복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는 얘기를 여러 번 들었지만 어쨌든 호흡은 그나마 안정되어가니 일반병실로 옮기자고 했다. 아마도 마지막을 함께하라는 의미인 듯 보였다.

일반병실로 옮기기 전, 중환자실에 있는 아이를 한번 보려고 들어가서 아이의 귀에

"은찬아, 엄마 왔어."

속삭였는데 은찬이가 갑자기

"엄마~"

부르며 눈을 번쩍 떴다. 의식이 없댔는데!! 아이는 눈도 떠보려 하고 힘겹지만 몸도 움직이려 하고 잡았던 손을 놓자 팔을 들어 내 손을 잡으려는 몸짓도 했다.

'역시 너도 살고 싶구나. 살려고 힘내고 있었구나.'

며칠 내내 아무래도 의식 회복은 힘들 것 같다던 담당의사는 놀란 토끼눈을 하고는

"뇌는 원래 한번 망가지면 회복이 안 되는 건데..."

하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일반병실로 옮긴 아이는 하루하루 엄청난 속도로 회복을 했다. 눈을 뜨려고 꿈뻑거리고있는 아이가 너무나 기특해서

"사랑해."

얘기하니 힘겹게 입술을 모아 쪽 뽀뽀를 해주었다.


1주일 만에 말을 하기 시작하더니 열흘쯤 되었을 때는

"유교수님, car-t 치료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를 할 정도로 좋아졌다.

병동 담당이라 자주 뵈었던 주교수님과는 허허 웃으며 5분 넘게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후에 주교수님은

"어머님, 사실 왜 이렇게까지 하실까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은찬이와 대화 나눠보니 왜 그러는지 알겠어요. 너무 예쁜 아이네요."

하셨었다.


나와 웃으며 꽤 많은 대화도 했다. 동생 얘기를 할 때면 특유의 웃음소리로 껄껄 웃으며 집에 가면 많이 놀아줘야겠다고 다짐을 하는 멋진 오빠로 돌아왔다. 끝말잇기를 끝없이 했고 틈만나면 재활운동을 하며 기운이 날때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정신이 그렇게 맑을 수가 없었다.

기적이었다.

이대로 회복하면 6월 첫 주면 그렇게 기다리던 약을 쓸 수 있었다. 세포 채집 날짜도 잡아두고 그날이 오기만을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렸다.


그 사이... 집에서는 병원비 마련으로 분주했다. 그때까지도 약가가 정해지지 않았지만 5억 정도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아직 건강보험 적용이 안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워낙에 고가의 약이다 보니 사회복지적 지원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사회복지적 지원은 재산상황을 보고 지원해주는데 자산이 3억 5천만 원 이상이 되면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약값이 5억인데 자산이 3억 5천 이상이면 아무런 지원도 받을 수 없다니... 이 역시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돈을 구해야 했다. 경기도에 집 한 채가 있음에도 대출이 안되었다. 부동산 규제로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제2금융권, 제3금융권까지 돌아봤지만 아무 곳에서도 그렇게 큰돈을 빌릴 수 없었다. 결국 집을 파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은찬이가 참 좋아하던 우리집을 급매로 내놓고 작은 월세방을 구했다. 아이의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 작은 집이었지만 그 집이라도 구할 수 있어 다행이라며 여름이면 킴리아를 마치고 퇴원하여 네 식구 옹기종기 모일 생각을 하며 신랑은 행복해했다.

이전 20화존경하는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