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말하려면 확신이 필요했다. 우선 내가 믿을 수 있어야 했다. 타인에게 무언가 자신 있게 말하려면 어떤 반박도 받아칠 준비가 돼있어야 했다. 나는 언제부터 그랬을까. 앞으로 기억을 거슬러 이십 년도 더 지난 일이 떠오른다.
첫 직장을 그만둔 후, 나는 직장을 구하지 못해 방황하다 급한 마음에 유아교재 영업 회사에 들어갔다. 대부분의 피라미드식 회사가 그렇듯 처음엔 영업직이 아니고 경험 삼아 몇 개만 팔면 바로 관리직으로 올려주겠다고 했다. 마음이 급해 눈이 어두웠던 건지 아직 순진했던 건지 세상 물정 모르고 그런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나는 그걸 진실이라 철석 같이 믿고 내 주변 사람들에게 물건을 팔기 위해 애를 썼다. 처음엔 친척들에게 전화를 했고 나중엔 친구들에게 전화했다. 그런 와중에도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대학 친구들에게는 전화하지 않았다. 이제와 생각하면 알량한 자존심이었다.
그렇게 몇 주를 보내다 속은 걸 알고는 그곳을 그만두었다. 나중에야 그런 곳의 실상을 알게 되었고 다른 사람처럼 빚을 지고 나오지 않은 걸 감사라도 해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그때 친척들에게 진 마음의 빚은 고스란히 내게 부끄러움으로 남았다. 내가 전화했을 때 나는 너무나 확신에 차서 물건을 팔았지만 내 전화를 받았던 당사자들은 모두 알고 있었을 터다. 두고두고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싶을 만큼 수치심을 느낀다.
어떻게 거기서 나왔는지 이젠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지도 모른다. 내가 그곳을 나오는 것에 큰 영향을 주었을지 모를 한 아이의 말만남았다. 그 아이는 다른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알게 된 동갑내기였다. 물건을 사라고 전화한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런 일로 너를 잃고 싶지 않아. 너랑 오래 만나고 싶어. 내가 그걸 살 수도 있지만 그러면 우리는 서먹해질 거야."
거절의 말을 노골적으로 하는 그 아이가 미웠다. 그 일로 우리 사이는 급속도로 냉각되었을 것이다. 결국 그 아이가 옳았지만, 그 말은 비수가 되어 아직도 내게 남아있다. 나와 같은 나이인 그 아이는 어떻게 그렇게 냉철할 수 있었을까. 그 아이에 비하면 나는 세상 바보 천치였다.
그 일 이후 나는 남들에게 무언가를 권하지 않는다. 내가 경험하고 나서 정말 좋은 것이 있대도 내 주변에 적극 권하거나 추천하지 않는다. 이십여 년 전 느꼈던 사람들의 비웃음과 같은 시선이 내 뒤에 따라올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는 좋지만 남은 좋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나를 더욱 소극적으로 만들었다.
다음에 하게 된 일은 학생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전공이기도 하고 학생 때부터 계속 해오던 일이라 좋았다. 내가 잘 알고 잘 전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확신할 수 있으니 불안감이 적었다. 적어도 '잘못되었어'라는 말을 듣지 않도록 말하려 애썼고 가르쳤다. 그게 습관이 되었을까. 내가 잘 모르는 것에 대해 누가 생각을 물으면 꼭 단서를 붙인다. 잘 모르겠네, 나는 그랬는데 사람마다 다르니까.
가르치는 일만 하다 몇 년 전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말은 신중하게 하려 하면서도 일은 신중치 못하게 저질러 버리곤 하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상담이었다. 늘 관심이 있었고 그저 재미있어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일이 되니 내 안에서 무언가 삐그덕거렸다. 오랫동안 길들여진 내 습관과 일의 특성이 충돌하는 것이었다. 상담을 하면서 내가 확신하지 못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돌아서서 아닌데, 하고 갸우뚱할 것 같았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순간이 오긴 할까. 내가 신도 아닌데, 그것이 반드시 옳은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그런 괴로움이 쌓이다 한계치에 다다라 나는 일을 그만두었다.
오늘 한 기사를 읽었다. 일을 위해 자신을 놓쳐 버린 사람이, 한동안 일을 떠나 자신을 찾았다고 했다. 돌아와서 한 말은 일과 자신을 분리하라는 것이었다. 그랬다. 나는 일과 나를 분리하지 못했다. 상담은 일의 특성상 더욱 그렇다. 내담자와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도움을 줄 뿐인데 나는 정답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중에 원망을 듣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문득 한동안 떠나 있던 일을 다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톱만큼도 다시 해 보려는 마음이 들지 않던 일인데. 나와 분리해야 한다는 말에 용기가 한 방울 솟아났다. 나는 신이 아니다. 내 인생도 모르는데 남의 인생에 정답을 어찌 알겠는가. 다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바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