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하는 기쁨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by 세번째 삶

버스에서 내렸다. 나는 마주 오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걸었다. 혹여나 유리창이 비친 나를 보게 될까 봐 옆으로 눈을 돌리지도 못했다. 약속 장소는 버스에서 내려 십 분 정도 걸어야 한다. 등에 땀이 나도록 빠르게 걸었다. 최대한 내 츄리닝 바지가 보이지 않게 롱 패딩의 아랫자락을 여몄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도 나를 보며 웃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아 나도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남들의 시선을 그렇게도 의식하는 내가 이런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일 년에 몇 번 만나지 않는 모임이 있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만들어져 몇 년째 이어지고 있지만 자주 모이지는 못한다. 그래도 연말 모임만큼은 빠뜨리지 않는다. 매년 드레스 코드를 정해 파티를 하는데 올해 모임의 콘셉트는 특이한 복장하기. 나는 그들의 대화 속에 있는 것이 즐거웠고 그렇게 밝은 분위기가 좋아서 참여했기에 그동안에는 특별히 드레스 코드에 신경 쓰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나도 그들따라 즐겨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마침 최근에 종영한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동백이를 지켜주던 동네 센 언니들 '옹벤져스' 생각이 났다. 가장 특이했던 꽃무늬 츄리닝이 맘에 들었다. 여기저기 검색해 봐도 그런 꽃 츄리닝은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찾아보니 꽃은 아니지만 보는 순간 웃음이 터질 것 같은 츄리닝을 찾아냈다.


그런 종류의 화려한 옷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늘 차분한 옷차림인 내가 그런 차림을 한다면 나를 아는 이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벌써부터 사람들의 반응을 상상하며 주문을 했다. 해외 배송이라서 일주일이 넘게 걸린다고 했다. 다행히 파티 날짜까지 시간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배송된 날, 그 옷을 입고서 아이들에게 보여주었더니 그게 대체 뭐냐는 반응이다. 성공이다. 내가 원하던 느낌이야.


약속 장소에 도착해 롱 패딩 아래로 보이는 내 바지 무늬에 사람들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롱 패딩을 벗어 나의 화려한 츄리닝 풀샷을 보여 주었다. 그런 옷은 대체 어디서 샀느냐고, 너무 재미있다고 칭찬을 받았다. 크리스마스 트리 옆에 서니 누가 트리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노란 뽀글머리 가발까지 쓰면 영락없이 껌 좀 씹는 동네 센 언니 모습이다. 사람들이 의외의 내 모습에 즐거워하니 뿌듯했다. 내게 이런 모습이 숨어 있었다는 것에 더욱 놀랐다.




올해는 내 안에 침잠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나를 바깥으로 밀어냈던 한 해다. 내 앞에 닥쳐오는 것들을 피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상황들을 받아들였다. 그럼으로써 내 안에 있던 것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들여다보고 다시 들여놓을 수 있었다. 그렇게 보낸 일 년의 마무리로 옹벤져스 퍼포먼스는 적절했다. 예전의 나라면 생각조차 하지 못할 일을 시도한 내가 맘에 들었다. 동백이를 지켜 준 옹벤져스처럼 나를 지키는 나만의 센 언니 옹벤져스를 내 안에서 꺼냈다.


내 앞에 있는 것들 중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받아들였던 과거를 지나 그 경계로 한발 나아가는 현재를 거쳐 미래에는 또 어떤 내 모습을 보게 될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