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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번째 삶 Jan 11. 2020

두려워하는 당신을 응원합니당

울어도 됩니다

'당당 : 당신을 응원합니당'. 금요일 저녁 새로 시작한 예능 프로그램이다. 15분씩 여섯 개의 코너로 이루어져 있고 그중에 '당신을 응원합니당' 코너가 나를 잡아끌었다. 사실 앞의 다른 코너를 보다가 채널을 돌릴까 했는데 우리가 잘 모르는 당신들을 응원한다는 설명에 채널을 고정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이나 따야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이름 석자를 알리게 되는 운동선수들. 방송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선수들을 찾아가 응원한다고 했다. 첫 방송에서 응원한 선수는 제주도에 있는 초등학교 유도부 선수 두 명. 국제대회에 출전한 초등학교 4학년생과 2학년생이었다.


경기를 앞두고 4학년 유도선수는 대기석에 앉아 연신 눈물을 찍어냈다. 그 어린아이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아서 나도 눈물이 났다. 어렵게 첫 경기에 이기고 나오면서 눈물을 터뜨렸는데 코치는 울면 안 된다고 다음 경기를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 경기에서 진 후에도 울었다. 코치는 몇 번 울다 보면 울지 않는 때가 온다고 했다. 그때를 기다려 줘야 한다고.


다음 경기에 출전한 2학년 유도선수의 오늘의 목표는 '울지 않기'라고 했다. 경기에 들어가기 전에 울고 경기에 진 후 내려오면서 울고. 역시나 코치는 울지 말라고 했지만 잘했다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열 살 꼬마 유도선수에게 오늘의 경기는 두려웠지만 다음 도전을 이끌어 줄 힘이 될 것이다.


이 어린 선수들을 보면서 나는 왜 함께 눈물을 흘렸을까. 나는 그 선수들보다 네 배 이상의 세월을 살아왔지만 그런 순간을 겪었던가 돌아본다. 오로지 자신을 믿고 혼자 나가서 싸워야 하는 고독한 두려움을. 나 혼자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순간을. 세상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방법을 깨친 후에는 좋든 싫든 자신만의 방식이 생기고 거기에 의지를 하게 된다. 하지만 이제 겨우 열 살이 넘은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두려움이었을지. 그들의 두려움이 느껴져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나도 알 것 같아서 함께 눈물이 난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울어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들에 비해 나는 운동선수가 아니니까,라고 쉽게 말하기엔 나는 지나치게 책임지는 것을 회피하며 살아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얻기까지는 혼자 결정하고 책임을 진 것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했고, 결과가 맘에 들지 않으면 그들 탓을 했다. 그 후에도 많이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직에서 책임은 최소한으로 지려고 했고 결혼한 후에는 남편의 뒤에 숨어 책임을 덜어냈다. 얼마 전에야 내가 깊이 깨달았듯이 나는 책임지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무서워한다는 말이 더 잘 맞겠다. 어린 선수들처럼 정면으로 맞서 싸워 자신의 두려움을 이겨낸 경험이 거의 없었다.




나는 운전을 못한다. 대학 졸업하기 전에 운전 면허증을 어렵게 땄다. 내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떨어진 시험은 운전면허시험이었다. 우스갯소리지만 진실이다. 취업하기 전에 필요할 것 같아 따 두었지만 그 후로 운전을 할 일은 없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야 운전의 필요성을 느꼈고 면허를 딴지 십오 년 만에 운전 연수를 받았다. 그러다 집 앞 낮은 기둥에 차 앞문을 긁는 사고를 냈고 그 이후로 겁을 먹어 운전을 포기했다.


언젠가 운전을 못한다는 것은 책임을 지기 싫어하는 방어기제라는 글을 읽었다. 나의 경우와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아이들을 태우고 다니려고 운전 연수를 받았는데 아이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불안은 나를 두렵게 했다. 가끔은 남들이라고 다 하는 운전을 못하는 내가 너무 못나 보여 좌절했지만 난 그냥 좀 불편하게 살겠다는 핑계로 버텼다. 운전 안 해도 살 수 있다고. 사실은 두렵고 책임지기 싫었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이었다. 운전을 회피함으로써 책임질 일을 만들지 않았다.


오늘 어린 유도 선수들의 도전을 보는 동안 나는 많이 부끄러웠다. 경기에 앞서 울면서도 도망치지 않고 경기장으로 걸어 나갈 수 있는 용기가 부러웠다. 나는 그렇게 용감하게 나가서 싸운 적이 없었다. 싸워야 할 일이 있을 때 누군가의 뒤로 숨거나 도망쳐 버렸다. 회피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나의 방식으로 굳어졌다.


지금 이런 내 모습이 맞게 살고 있는 것인지 혼란스럽다.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하는지 모르겠다. 무엇으로부터 나는 책임을 회피하며 살게 된 건지, 어디쯤의 기억부터 끄집어내야 할지. 왜 나는 책임지는 것을 그렇게 두려워하는 걸까.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뿐'이라고 했는데. 나는 어떤 계기로 나를 숨겨왔을까. 이대로 살아도 될까.


이런 나를 깨뜨리기 위해 우선은 내가 맞서야 하는 일로부터 도망치지 않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 싸움에서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부터 해야 한다. 남에게 싫은 소리 하는 것을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싸워서 질까 봐 두려워했던 것은 아닐까. 부당함에 맞서는 것이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서 싫은 게 아니라 누군가의 결정에 따르는 것이 쉽고 책임질 필요도 없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동안 피하고 숨어버렸던 일들이 숱하게 떠오른다. 결국 그러한 두려움이 내 인간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제 와서 그런 일들을 복기하여 떠난 그들을 불러올 생각은 없다. 그런 내 모습을 보았으니 앞으로는 그러지 않기를 바랄 뿐. 울더라도 피하지 말고 맞서 싸우기를.




오늘 밤 꼬마 선수들의 아름다운 도전을 보고 나도 당신을 응원하고 싶어 졌다.

두렵고 불안해서 자신을 자신 안에 가두어 둔 나를,

우는 모습을 들키기 싫어 숨어버린 당신들을.


두려워하는 당신을 응원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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