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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번째 삶 Jan 13. 2020

거미의 변명

지난밤, 거미는 시인했다. 그 거미줄의 주인은 자기가 맞다고. 이제껏 작은 나무상자 안에 몸을 숨겨왔노라고. 큰 거미의 자존심도 버린 채 다육 화분들 사이에서 돌아다니며 거미줄을 치고 근근이 살아왔으며 자신같이 고귀하고 큰 거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장소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거미가 밝힌 사연은 이랬다.


어느 깊은 밤 인간들이 조용해져서 나는 활동을 시작했지. 낮에는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잠을 자지만 어두운 밤이 되면 그곳은 나의 무대가 돼. 그곳은 냄새나는 구석이 많아. 축축하게 늘상 젖어있는 곳도 있어. 내가 사랑하는 곰팡이가 핀 곳도 찾기 어렵지 않았.


그날도 나의 긴 다리로 성큼성큼 어둡고 축축한  곳 탐색하고 있었지. 그런데 갑자기 내가 산책하던  환해졌어. 그러더니 작은 인간이 문을 열고 들어왔지. 아니, 문을 열던 순간이었나? 그 인간이 소리를 질러댔어.


난 내가 할 수 있는 최고 속도로 구석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실패했어. 그 인간 앞을 지나가야 했기 때문이지. 그래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멈춰 있었는데, 그 작은 인간이 소리를 지르며 나가더군. 이제 꼼짝없이 죽었구나 싶었는데 다행히 나를 해칠 생각은 없었는지 내가 구석으로 숨을 시간을 주더군. 내가 재빠르게 구석으로 몸을 숨긴 뒤 다른 인간이 작은 인간을 따라왔지만 나를 발견하지 못했어.


그날 밤 나는 내 정체를 들킨 것에 겁을 먹고 숨어 있었지.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걱정으로 밤을 보내고 이곳을 떠나기로 결정했네. 그동안 정든 이 곳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젯밤과 같은 일이 또 일어나면 그게 나의 마지막일 것 같아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네.


당장 다음 날 나는 그곳을 떠났어. 환한 대낮이긴 하지만 움직였다네. 인간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재빠르게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지. 내가 살던 곳에는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축축하고 어두운 곳을 찾아서, 내 본능이 시키는 대로.


 그런데 이번엔 어제 만난 인간보다 더 큰 인간과 마주친 거야. 인간은 우뚝 서 있는 커다란 기계 위에 쌓인 먼지를 닦고 있었는데 조용히 벽을 타고 가던 나를 발견한 것이지.


그 인간은 의외로 조용하고 침착하더군. 소리도 지르지 않고 나를 가만히 지켜보았어. 우리 거미의 고귀한 태생을 알아주는 것 같았지. 하지만 그가 나의 품격을 알아보았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거기 머무를 수는 없었다네. 나는 잠시 멈춰 그 인간에게 감사를 표한 뒤 다시 구석으로 가기 시작했지.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작은 화분들이 있는 곳이었어. 좀 더 갔다면 열린 창문 틈으로 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야박한 인간이 내가 걸어가는 새를 못 참고 문을 닫아버렸지. 내가 아무리 거미족에서는 긴 다리를 자랑하는 뛰어난 종족이라지만 그 먼 거리를 어찌 그렇게 빨리 갈 수 있단 말인가? 하여간 인간이란 종족은 예나 지금이나 함께 살아가는 동물에 대한 배려라는 것이 없더군. 나는 화가 나서 좀 전에 했던 감사 따위는 던져버렸다네.


하는 수없이 작은 화분들이 놓인 나무상자에 자리를 잡았지. 구석에 거미줄을 치고 먹이를 기다렸어. 식물을 심어둔 화분이 컸더라면 좋았을 텐데. 벌레들이 사는 흙이라면 더 좋았을 테고. 내가 보기에도 작아 보이는 화분들에는 진드기 한 마리 보이지 않았어. 전에 살던 곳에는 하수구를 통해 올라 온 하루살이도 심심치 않게 맛볼 수 있었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을 굶었다네. 이 좁은 곳에서는 내 긴 다리를 숨기고 있기도 힘들었어. 그리고 이제 나는 내 품위를 지킬 수 없을 만큼 기력이 쇠했다네. 미안하지만 화분 사이에 내가 남겨놓은 줄은 알아서 처리해주길 바라네. 이렇게 붙잡히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군. 이제 나는 시간이 마 남지 않았어. 조용히 사라질 테니 그만 나를 놓아주게나.






※ 거미와 마주친 경험을 토대로 지어 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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