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기분 같은 건 무시하고

by 세번째 삶

색연필 일러스트를 배우러 다닌다. 시작한 지 열 달이 넘었다. 처음에 색연필은 각자 준비해 오라고 했다. 우선 갖고 있는 게 있으면 가져오고, 새로 살 것이면 참고하라고 전문가용 브랜드를 추천해 주셨다. 색깔은 이왕이면 많은 게 좋다고, 72색이면 적당하다고. 그냥 알록달록 색칠을 생각하던 나는 집에 있던 학생용 24색 색연필로 충분할 줄 알았다.


나와 함께 배우기 시작한 두 분. 한 분은 선생님이 사라는 72색 색연필을 샀고, 다른 한 분은 집에 딸이 쓰던 게 있다며 24색으로 가져오셨다. 나는 누가 추천해 주는 것을 그대로 따르기보다 직접 찾는 것 선호하는 편(이상하게 누군가의 추천에는 거부감이 이는 편)이라 추천해 주신 것과 거의 같지만 다른 종류로 72색을 샀다. 예상보다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취미로 할 건데 이렇게 비싸도 되나 하는 마음. 나도 그냥 24색으로 할걸 그랬나 싶었다.


우리 세 명은 처음에는 비슷한 속도로 진도를 나갔고 24색 색연필도 큰 어려움은 없었다. 몇 달 후, 그분은 나보다 진도가 빨랐고 색깔 고르기가 점점 어렵다며 색연필을 새로 사 오셨다. 이번엔 36색, 그것도 사용하던 것과 같은 브랜드. 선생님은 36색을 살 것이면 다른 브랜드로 사지 그랬느냐고, 그래야 다른 색이라도 있을 텐데 하며 아쉬워했다.


그래도 그분은 그림에 대한 열정만큼은 누구보다 커서 결석 한 번 하지 않았다. 숙제도 못 해가는 나에게 젊은 사람들은 일이 많아 바쁘지만 우리(연세 드신 분)들은 시간이 많아서 숙제도 많이 해 올 수 있다고 하셨다. 그건 시간보다는 열정이나 애정의 문제일 것 같지만 말이다. (나로 말하자면 너무 열정적으로 하다 보면 금방 지칠까 봐 집에서까지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변명을 붙여본다.) 그래서 지금은 그분이 나보다 한 스무 장 정도는 진도가 빠르지 싶다.


요즘 나는 정말로 일이 많아서 퐁당퐁당 수업에 간다. 오랜만에 뵌 분들이 색연필 얘기에 열중해 있다. 어떤 분이 90색의 새로운 브랜드 색연필을 샀는데, 너무 좋다고 했다. 색도 많지만 너무 부드럽다고. 와중에 그분이 자기도 색연필을 새로 샀다고 했다. 선생님이 반기며 72색이냐고 물었더니 또 36색이라고 했다. 색연필을 더 좋은 걸 사야겠다고 했더니 딸이 사 갖고 왔더란다. 그래도 브랜드는 선생님이 추천한 거라고. 전문가용이 아니라 학생용이었지만. 전문가용과 학생용은 가격차가 좀 나는 편이다. 사람들이 한 마디씩 했다.


- 아이고, 색이 더 많아야 한다고 하지.


- 응, 내가 더 좋은 거 산댔더니 물어보지도 않고 사 왔어.


- 그럼 다른 걸로 바꿔달라고 하지.


- 바꾸러 가기 멀어서.


- 거기 그렇게 안 멀어.


나는 대화를 들으며 묵묵히 그림을 그렸다. 손은 쉴 새 없이 움직이면서 생각했다. 그분이 말하지 못한 어떤 것이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안타까움에 말을 했겠지만 그분이 그 말을 한 이유는 따로 있을 것 같았다. 가령 딸이 사다 준 것이 자랑하고 싶다거나. 자기의 새 색연필을 보여주고 싶다거나. 어떤 색연필을 쓰는가는 사실 크게 상관없다. 직업으로 삼을 것도 아니고 본인의 만족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열악한 조건에서 훌륭한 그림을 그려내는 것이 훨씬 가치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선생님과 다른 사람들의 말은 그렇게 여러 번 돈을 쓸 테면 색이 다양하면 좋겠다는 것이고 좋은 재료를 사용하면 그림의 퀄리티는 더 좋아지리라는 아쉬움인 것을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좋은 마음으로 색연필을 사 온 딸이 오히려 잘못한 것처럼 몰아가는 상황이 그분은 서운했을 것 같다.


남의 기분 같은 건 무시하고 사실만을 야박하게 짚어주는 모습은 낯이 익다. 자주 볼 수 있는 내 모습이다. 그들 사이에 껴들 새가 없어 그냥 듣고 있던 나는 거기에서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보았다. 나도 그 안에 있었더라면 아마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말을 했을 것이다. 집에 돌아오며 나라도 따님이 참 배려심 있으시다고 말씀드릴걸, 뒤늦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더 비싸고 더 많은 색연필을 가진 어떤 사람보다 본인의 상황에서 최선의 열정으로 그림을 그리는 그분이 나는 가장 존경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