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정산의 시기다. 연말정산은 남편이 혼자 다 알아서 하기에 어떤 서류가 필요한지 잘 모른다. 따로 제출해야 할 서류는 집에 있는 프린터로 출력했었는데 올해는 자주 쓰지 않아 프린터 성능이 시원찮다. 남편은 다른 건 다 준비가 되었고 주민등록등본과 아이들 안경점 영수증이 필요하다며 내게 서류 준비를 부탁했다. 나는 서류도 찾을 겸 동네 한 바퀴를 돌기로 했다.
설 연휴 다음날이라서 안경점 문을 열었는지 전화를 걸어 확인했다. 오늘 쉬는 날인지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등본은 떼어야 하니까 주민센터는 가봐야지. 가는 길에 들르려고 세탁소에도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세탁소는 문을 열었다고 했다. 부산여행에서 돌아와 아직 맡기지 못했던 코트를 들고 집을 나섰다.
집에서 걸어서 5분쯤이면 도착하는 세탁소에 주소를 적고 코트를 맡겼다. 드라이클리닝비용은 8천 원.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찾으러 오라고 했다. 세탁소를 나와 주민센터 쪽으로 걸었다. 걷다 보니 안경점 쪽이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어디 어디 들를지 생각할 때는 주민센터가 안경점보다 가까운 줄 알았는데. 전화를 받지는 않았지만 안경점에 들러 가기로 했다. 불이 꺼져 있으리라 예상했던 안경점은 불이 켜져 있었다. '식사 중'이라는 팻말이 문에 걸려 있었다. 전화 달라고 쓰여 있었지만 그리 급한 일이 아닌데 식사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주민센터로 발길을 돌렸다.
주민센터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낯선 분위기. 웬만한 민원서류가 인터넷 발급 가능해진 뒤로 주민센터에 들를 일은 일 년에 몇 번 안된다. 그렇다 해도 오늘은 더욱 낯설다. 나 말고 직원이 아닌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창구에서 민원인을 대하는 주민센터의 직원들은 모두 하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갑자기 마스크도 없이 동네를 돌아다닌 내가 너무 겁이 없는 건가 걱정스러웠다. 요즘 밖에 안 나가서 내가 심각한 분위기를 몰랐나. 습관적으로 창구로 가서 등본을 떼러 왔다고 말하고 보니 창구 모니터 뒷면마다 자동발급기로도 할 수 있다고 크게 쓰여 있었다. 발급 비용이 50%라고. 나는 그냥 발급기를 이용할 걸 생각도 잠시, 누가 만졌는지도 모르는 발급기를 만지는 것보단 직원에게 발급받는 것이 낫다고 생각을 고쳤다. 등본의 발급 비용은 400원. 200원 아끼는 것보다 안전한 게 낫겠지. 어느 쪽이 더 안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주민센터를 나와 우체국으로 향했다. 집에서 나올 때 아이들의 우체국 통장을 챙겨 나왔다. 아이들의 용돈을 통장에 넣어주겠다고 받아 놓고 몇 개월을 서랍에 있던 생각이 나서였다. 우체국에는 사람들이 붐볐다. 우편물을 부치려는 사람들과 금융일을 보려는 사람 중에 어느 쪽이 밀려 있는지 몰라도 대기석 의자에는 빈 곳이 보이지 않았다. 주민센터의 휑하고 차가운 분위기와 달리 우체국은 사람들이 많았지만 직원들조차 마스크를 쓰지 않고 있었다. 나는 약간의 불안을 느꼈다. 이래도 되는 걸까. 사람을 만나는 창구는 순서를 기다려야 해서 자동입출금기를 사용했다.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조심스러웠다.
우체국에서 나와 다시 안경점으로 걸었다. 아직도 '식사 중' 팻말. 좀 더 기다려 볼까 하다가 시계를 보니 처음에 내가 전화했을 때로부터 한 시간 정도 흘러 있었다. 이제는 전화해도 되겠지 싶어 전화를 걸고 있는데 사장님이 와서 문을 열었다. 전화 연결이 안 되더라니까 바쁘면 전화를 못 받을 때가 있다고 했다. 그 전화만 믿고 안 와봤으면 아쉬울 뻔했다. 연말정산용 영수증을 부탁했고 금방 받을 수 있었다. 아이들이 둘 다 안경을 쓰다 보니 안경 비용도 만만치 않다.
연말정산에 빠뜨리기 쉽다는 교복비와 안경비 서류는 카드 사용 내역으로 자동 입력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예전에 교복 비용을 전액 부담했을 때는 자동으로 교복비가 입력이 되었다. 그런데 지자체에서 교복 한 벌을 무상으로 주고 나머지 추가 구입 비용만 개인이 지불한 뒤로 자동 입력이 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봄에 추가 교복 구입을 하면서 연말정산용 영수증 얘기를 했더니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영수증을 줬던 기억이 났다. 그걸로 어떻게 하라는 건지. 그나마 얼마 되지 않아서 교복비는 따로 영수증을 청구하지 않았다.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나니 출출해졌다. 안경점 근처는 나름 대학로라서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저렴하고 다양한 먹거리가 있다. 다만 지금은 방학중이라 문을 열지 않는 곳이 많았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브리또 가게는 열지 않았고 토스트 가게는 열려 있었다. 조용한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쪽에서 사장님이 나왔다. 이 가게는 작년 봄쯤 사장님이 바뀌었다. 아이들과 애용해서 사장님 얼굴을 익혔었는데 어느 날 다른 분이 계셨다. 사장님이 바뀌었느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하셨지만 가게 이모저모와 토스트의 맛도 조금은 달라져 있었다. 그러고 나서 처음인가. 아이들의 토스트까지 포장해 아까 온 길과는 다른 길로 들어서 집 방향으로 걸었다.
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날이다. 길을 걷는 사람들 중에 마스크를 쓴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마주치는 사람들의 표정은 스산한 바람처럼 심난했다. 덩달아 흐린 것인지 미세먼지로 뿌연 것인지 모를 하늘 아래로 너무나 익숙하지만 자주 걷지 않는 동네 한 바퀴. 연말정산 서류 떼려고 걸은 길이지만 왠지 소박하게 그려질 하루를 만든 것 같아 뿌듯해졌다. 오랜만에 먹는 토스트는 맛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