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

그때의 우유병이 예뻤어

by 해든




새벽녘 언제나처럼 비슷한 시간에 잠이 깼다.

이불속에서도 느껴지던 냉기와 사위를 감싸던 어둠은 그새 어딜 가고

벌써 어슴푸레 밝아오는 창밖을 보니 계절의 변화가 새삼 느껴진다.

봄이 온 것이다.

냉장고문을 열고 구석에 놓여있는 우유를 꺼낼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우유의 소비기한이 알고보니 어마어마하게 길다는 사실을 실험이라고 하듯

사둔지 오래된 우유 한팩을 집어들었다.

흰우유를 마시면 배가 아파서 평소에 잘 먹질 않는데 변비에는 또 이만한게 없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쯤이었을까.

그리 넉넉한 형편은 아니어서인지 식구는 많았지만 배달 받아 먹는 우유는 딱 한병이었다.

물론 그 우유의 주인은 막내인 나였지만, 가끔은 유일한 우리집 아들인 오빠한테 뺏길때도 있었다.

아침에 문을 열고 나오면 마루끝에서 예쁘게 나를 기다리던 우유 한병!

요즘처럼 종이팩이 아니라 도톰한 유리병이었는데 요즘 내놔도 촌스럽지 않을만치 병이 예뻤다.

위에는 종이뚜껑이 빡빡하게 병입구를 막고 있었는데 손가락으로 혹은 숟가락으로 아주 조심히 잘 제거를 해야지 자칫 잘못하면 종이가 병속으로 쑥 들어가 버리곤 했다.

겨울철에는 날씨가 추워서 살짝 얼어 있던 우유를 따뜻한 이불을 뒤집어 쓰고 마시면 그 고소함은 배가 됐다.

초등학교때는 대부분 아이들이 학교에서 우유를 신청해서 먹었는데 한번씩 딸기우유나 초코우유가 나오는 날은 신이 났었다.

초등학교 6학년때 담임선생님께서 우유는 바로 넘기지 말고 입안에서 우물우물 씹으면서 넘겨야 더 맛있다는 말씀을 해 주신 기억이 난다.

단지 모양에 담긴 바나나우유는 지금도 나오지만 내가 어린 시절엔 흔하게 먹었다기보다는 조금 특별한 날의 기억으로 남는다.

엄마랑 목욕탕을 가는 날 만큼은 집에 오는 길 그 바나나우유가 꼭 내손에 쥐어져 있었고

아파 누워 있을때면 아버지는 바나나우유와 양갱을 사다 머리맡에 놓아 주셨다.

말수도 없고 자식한테 도통 정을 표현하지 못했던 그 옛날의 나의 아버지는 우유와 양갱에 그 걱정의 마음을 말없이 담아주신것 같다.

어른이 되고 나는 우유를 잘 마시지 않는다.

어릴적엔 잘 먹었던 우유가 지금은 흔히들 말하는 유당분해효소가 부족해진건지 먹으면 가끔 배가 아프고 불편하다.

먹거리들이 넉넉하고 흔하지 않았던 시절

넉넉치 못한 살림이었지만 빼빼 마르고 늘 부실한 막내딸에게 먹이고 싶었던 엄마의 마음이 담겨 아침마다 나를 기다리던 예쁜 우유 한병은 항상 고소하고 맛있었다.

이젠 아버지가 사다 주시던 바나나 우유 대신

남편이 편의점엘 들르면 가끔 사다주는 베스킨라빈스 딸기우유가 있다.

이건 왜 먹어도 배가 안 아프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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