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를 연기하다, 내 상처를 만났다.
3학년 초등학교 손녀에게 대노하는 할머니 대역을 의뢰받았다.
일단 나는 70대가 아니고 더군다나 손녀도 없다.
화를 낸다는 것?
오히려 화를 안내고 살아서 마음이 이미 너덜너덜해진지 오래다.
그러니 나에게 이 역할은 커다란 도전이었다.
그때부터 화를 내는 할머니 자료를 부랴부랴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작품이 있었다. 노희경 작가의 〈디어 마이 프렌즈〉.
14화, 끝까지 17분을 남겨둔 장면.
아름드리 나무가 어우러진 숲길. 포대기에 아이를 안은 채 터벅터벅 걸어나오는 희자(김혜자 선생님)
그 앞을 향해 오랜 벗 충남과 정아가 달려온다.
충남: (희자에게) 언니 어디가?
희자: (충남을 보며)너 왜 여깄어?
정아: (희자를 보며) 희자야...
순간, 희자의 입가가 씰룩이고 눈빛에 힘이 들어간다.
희자: 너 뭐야 니가 왜와,
나쁜년, 니가 여길 어떻게 와
니가 감히 여길 어떻게 와 (정아 머리를 쥐어뜯으며 달려든다)
정아: (울먹이며 다급하게) 나 정아야, 나 정아!
희자: 이 물어뜯어 죽일년, 이년아
육체적 실랑이 끝에 충남이 희자를 부여잡고 달랜다
충남: 언니 정신차려
숨을 몰아쉬던 희자는 조금씩 진정되더니 울먹이며 말하기 시작한다.
희자: 내가 너한테 전화했지, 내 아들이 열감기인데 도와달라고.
약먹었는데 안낫는다고 무섭다고 와달랬지.
너는 왜 맨날 그렇게 사는게 힘들어. 왜 맨날 힘들어서 내가 필요할때는 없어.
그리고 마침내 오열한다.
희자: 남편한텐 전화안되고, 그 밤에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데, 기껏 전화했더니 뭐 나보고
"나도 힘든데 징징대지 말라고!" 그러고 너 전화끊었지. 난 너밖에 없었는데
근데 넌 맨날 왜 이렇게 사는게 힘들어! 맨날 힘들어,
그래서 내가 맘놓고 기대지도 못하게 해.
그리고 마지막 절규
희자: 내 아들 살려내 이년아, 내 아들 살려내!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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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장면을 보는 순간, 이상하게도 희자의 말이 내 마음을 그대로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나도 늘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기대고 싶은 사람들은 늘 힘들었다.
항상 힘들어서, 내가 들어갈 자리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저렇게 서슬 퍼렇게, 가슴 깊숙한 곳에 펄떡펄떡 살아 있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그 딸들인 우리는 어디에도 기대지 못한 채 조용히 멍들어 간다.
그렇다면 그런 엄마들과 딸들의 손녀 세대는 과연 마음속에 꽃밭을 가꿀 수 있을까?
〈디어 마이 프렌즈〉는 이렇게 3대에 걸친 여인들의 고통과 외로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훌륭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맡은 작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번 할머니 역할을 준비하면서 수많은 질문이 떠올랐고, 내 안의 오래된 상처들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고통스럽지만 그만큼 소중한 경험이었다.
무사히 개봉하여 많은 관객들을 만나기를.
그리고 내가 흘린 눈물처럼 또 한 번 누군가의 가슴을 울릴 수 있기를 조심스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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