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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직유 Dec 09. 2022

가면을 벗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안녕, 나의 페르소나

페르소나는 그리스 어원의 '가면'을 나타내는 말로 '외적 인격' 또는 '가면을 쓴 인격'을 뜻한다. 우리들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관계를 맺게 되고, 그 관계 속에서 역할을 맡게 된다. 맡은 역할에 따라 가면을 바꿔 쓰며 다른 태도를 보이는데, 이 가면들을 '페르소나'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들은 몇 가지의 가면들을 가지고 때에 따라 가면을 갈아 끼우며 산다. 부모님 앞에서는 착한 딸의 가면을, 선생님 앞에서는 성실한 학생의 가면을, 애인 앞에서는 상냥한 여자의 가면을, 면접관 앞에서는 자신감 있는 인재의 가면을 쓴다. 가면을 잘 활용한다면 처세가 뛰어나고, 사회생활을 잘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반면, 가면이 너무 많거나 가면들 사이의 괴리가 심하다면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지도 모른다. 당신에겐 몇 개의 가면이 있는가? 혹시 자신이 이중인격자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에게도 가면이 여러 개였던 때가 있었다. 어떤 가면이 나한테 잘 어울리는지 이리저리 갈아 끼워 보고, 다른 사람이 쓴 좋아 보이는 가면도 따라 써보고, 그중 가장 반응이 좋은 가면들을 겹쳐 쓰며 살았다. 잘 어울리는 가면, 잘 안 맞지만 오랜 세월 쓰다 보니 나한테 맞게 변형된 가면, 억지로 끼워 맞춘 듯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가면 등 종류도 다양했다. 하지만 지금은 가진 게 몇 개 없다.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동해에 오고 난 뒤 서서히 사라졌고, 벗겨냈기 때문이다. 


가면을 어떻게 벗었냐면,

1. 동해에 오고나서는 만나는 관계가 제한적이었다. 사용하는 가면 또한 한정적이었다. 서울에서 직장다닐 때에는 직장 동료, 친구들, 다양한 소셜모임에서 만난 사람들로 관계가 넘쳐났고, 만나는 관계에 따라 가면을 바꿔썼다. 지금은 부모님과 펜션 손님들이 내가 만나는 관계의 8할이었다. 심지어 지금은 비수기라 부모님이 70프로, 손님이 10프로다.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면을 갈아 끼울 필요가 없어서 편하긴 하다. 딸의 가면과 친절한 펜션 주인장의 가면이 나의 주된 가면인 셈이다. 펜션 손님들과는 대면할 일이 많지 않기 때문에 직장생활을 할 때처럼 가면을 오래 쓰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게 아주 큰 메리트다. 체크인할 때 잠깐 쓰고, 오며 가며 마주칠 때 또 잠깐 쓰면 그만이니까. 그렇게 자주 사용하지 않는 페르소나들이 자연스럽게 약화되었다.


2. 새로운 관계를 만날 기회가 적었다. 가면이 더 이상 새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여기서 새로운 관계라 함은, 사적으로 친해지고 싶은 관계, 그래서 잘 보이고 싶은 관계를 말한다. 함께 일하게 될 동료라던지, 알고싶은 낯선 사람 또는 잘 보이고싶은 상사같은 존재가 없었다. 펜션 손님의 경우, 낯선 사람이긴 하지만 훌쩍 왔다가 홀연히 사라지기 때문에 관계가 지속되지 않는다. 발전 가능성이 없는 관계에는 에너지를 쏟을 필요가 없으니 가면을 쓸 필요가 없었고, 그래서 점점 산골소녀.. 아니 산골 아줌마가 되어갔다. 이 또한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강원도 두메산골에 사는 자연인을 보고 싶다면 나를 찾아오라.


3. 나 자신과의 치열한 사투 끝에 여러 개의 가면을 벗어던졌다. 유능한 직장인, 매력적인 여자, 자유로운 청춘의 가면이었다. 동해에는 나를 감시하고 눈치 주는 사람도, 나에게 패배감을 안겨줄 경쟁자도 없었는데, 이상하게 가면을 벗을 수가 없었다. 끊임없이 이상적인 사람들과 나를 비교했고, 심지어 두꺼운 가면을 쓰고 살았던 시절을 그리워하기까지했다. 가면을 쓰고 살았을 때의 내가 공허하고, 불행했다는 걸 알면서도, 맨 얼굴이 너무 초라하고 볼품없게 느껴져서 가면을 벗을 수가 없었다.


물론 가면의 순기능도 있다. 사회적 인정과 아름다움, 사교성, 열정적인 태도를 추구하는 가면이었으니 계속 쓰고 있었으면 지금보다 더 성장하고, 발전했을지도 모른다. 불안함도, 열등감도 원동력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벗었다. 일단은 벗어야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역할극에서 맡은 배역을 꽤 잘 소화했음에도 인생은 내 시나리오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변수와 방해물이 끝없이 나타났다. 원하는대로 흘러가지 않는 인생에 너무 지쳐서, 그만 쉬고 싶었다. 하지만 가면을 쓰고 있으니 쉬는 것도 내 맘대로 안됐다. 쉬려고만 하면 불안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쉬는 것도, 열심히 하는 것도 내가 정하고 싶은데, 선택권은 가면에게 있었다. 그래서 쉬려고 벗었다. 아니, 살려고 벗었다.


오랜시간 가면을 쓰고 살았더니, 가면이 곧 내 얼굴이었다. 분간이 되지 않았다. 오랫동안 유능한 직장인, 매력적인 여자, 자유로운 청춘의 모습을 흉내 내며 살았다. 이전에 쓰고 있던 똑똑한 학생, 성격 좋은 친구, 리더십 있는 반장 가면의 진화 버전이었다. 어떤 가면은 꽤 잘 어울렸고, 어떤 가면은 영 아니었지만 오랜 시간 쓰고 있으니 안 어울리는 모습마저 내가 되었다. 나조차도 가면 쓴 모습을 나라고 굳게 믿었다.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변수로 균열이 생기기 전 까지는 말이다. 아버지의 병간호를 위해 서울을 떠나고, 사회적 관계들과 친구들 곁에서 멀어지고나니, 금 간 가면 틈 사이로 맨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씩 드러나는 민낯이 충격적이었다. 가면이 없는 모습을 한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어서, 내 모습이 꼭 실패자 같았기 때문이다.


'서른인데.. 친구들은 열심히 커리어 쌓고 있는데.. 난 뭐 하고 있는 거지?'

'주위 친구들은 결혼하는데, 난 연애도 못하고 있네..'

'청춘인데 나만 너무 재미없게 살고 있나?'


맨 얼굴을 차마 직면할 수 없어서, 가면을 붙잡으려 애썼다. 사회적인 인정을 좇아 대학원 진학을 준비했다. 학점은행제 수업을 들었고, 자격증 시험을 준비했다. 매력적인 여자라는 인정을 받고싶어 여러 모임에도 나가보고, 난생처음 소개팅 어플로 남자도 만났다. 실패자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하지만 발버둥 칠수록 수렁에 빠지는 듯했다. 그렇게 깊은 우울감과 패배감 속을 헤매다 바닥을 치고 나니 손아귀에 힘이 없어 가면이 놓였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의 현실을. 나의 맨 얼굴을. 얼굴에 붙은 가면을 벗겨내는 일은 살점을 도려내는 고통을 동반했지만, 결국 분리에 성공했다. 운이 좋았다. 아빠가 나를 동해로 부른 덕분이었다.

"괜찮아. 안 죽어"

이 말이 내 가면을 벗겨주었다.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 아니면 어때? 괜찮아~ 안 죽어~', '사회적으로 인정 못 받으면 어때? 괜찮아~ 안 죽어~', '아무것도 하기 싫으면 하지 마! 괜찮아~ 안 죽어~ 때 되면 하고 싶어 지겠지', '여자로 매력 없다고? 괜찮아~ 안 죽어~'. 남자 사랑 못 받는다고 세상이 무너지나? 남자들이 원하는 모습이 되려고 애쓸 때보다 지금이 훨씬 낫다! 비록 서울살이 할 때보다 10킬로가 찌고, 거적데기 같은 옷만 걸치지만, 오히려 지금 모습이 더 보기 좋다. 도시 여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웬 자연인 하나, 시골처녀 하나만 남았지만 사는데 아무 지장 없다. 불안한 생각의 끄트머리에 "괜찮아~ 안 죽어~" 한마디 붙이니 세상만사 고민이 가벼워졌다. 당장 죽는 일 아니니 됐지 뭐. 


그러고 나니 하고 싶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면이 좇던 사회적 인정이나 타인의 인정이 아닌, 내가 원하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요가와 명상을 하며 온전히 혼자가 되는 시간을 좋아하게 되었고, 혼자서도 평온함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정말 괜찮았다. 나를 옭아매는 것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이제 내가 가진 가면은 탈부착이 가능해졌다. 붙어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게, 한번 떼어내고 나니 이제야 눈에 보였다. 이젠 다른 사람들이 나를 무능하게 봐도, 못나게 봐도, 한심하게 봐도 괜찮다. 맨얼굴을 봐서 아는데, 꽤 괜찮거든.


당신의 가면은 탈부착이 가능한가? 얼굴과 가면을 분간할 수 없다면, 일단 가면을 벗어보자. 가면을 벗지 못하겠다면, 이유는 무엇인가? 가면을 벗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은가? 마음껏 상상해보자. 그러고 말해보자. "괜찮아, 안 죽어!" 당신의 민낯도 분명 꽤 괜찮을것이다. 지레 겁먹고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 몰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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