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겨운 인생 역할극
요즘 한 번 도전해보고 싶은 것이 생겼다. 바로 연기다. 학교 다닐 때, 전공선택과목으로 연기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당시에는 수많은 동기들 앞에서 연기를 해야 하는 게 떨리고, 부끄러워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왜 더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는지 아쉬울 따름이다. 지금 생각하면 연기를 배우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 당시에는 남들 앞에 서는 게 부끄럽고 창피했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낯짝이 두꺼워진 건지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그저 새로운 경험에 대한 호기심과 설렘만 가득하다.
배역을 핑계 삼아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경험을 하고 싶다. 캐릭터에 감정 이입해 내면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현생에서는 올라오는 감정을 그대로 내뱉으면 분노조절장애나 사이코패스로 찍힐지 모르지만, 연기는 괜찮지 않은가? 현생에서 풀리지 않는 답답한 감정을 연기를 통해 해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연기를 잠재된 감정과 욕구를 표출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또 내가 가진 예민한 감수성과 뛰어난 공감능력을 잘 활용해보고 싶다. 지금까지의 삶에서는 예민한 감수성과 공감능력이 자주 단점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연기에서는 긍정적인 자원으로 활용될 것이다. 연기를 잘 이용한다면, 내가 나를 온전히 수용하고, 타인과의 다름을 인정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솔직함을 잃은 아이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려보면, 나는 남들 앞에 나서기를 참 좋아했다. 한마디로 '나대는 아이'였다. 왕따의 시련을 겪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기질이란 건 엄청났다. 암흑의 시기에도 굴하지 않고 나대는 기질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친구들에게 나댄다는 평을 듣지 않으면서 나댈 수 있는 방법을 찾았고, 고등학교 3학년까지 줄곧 반장을 도맡아 했다. 하지만 반장이라고 해서 나를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반장으로서의 책임감, 의무감, 희생정신에 밀려 나를 드러내고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억제되었다.
그렇게 나는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 따라서 그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나를 연기하며 살았다. 앞에 있는 관객에 따라 좋은 친구, 리더십 있는 반장, 모범적인 학생, 착한 딸의 배역을 맡아 역할에 충실한 삶을 산 것이다. 하지만 관객이 없는 독백의 순간이 오면, 나는 멍하니 눈알만 굴렸다. 뭘 해야 할지, 어떤 게 나한테 더 좋은지, 어떤 게 옳은 선택인지 알 수 없었다. 답은 내 안에 있다고들 하는데 도무지 찾아지지를 않았다. 모범적인 학생이 되기 위해 성실함을 연기하고,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 자상함을 연기하고, 착한 딸이 되기 위해 희생을 자처했는데, 관객이 사라지니 역할도, 캐릭터의 성격과 목적, 방향성도 다 같이 사라져 버렸다.
심지어 나는 내가 살아왔듯, 내 사람들도 나처럼 배역에 충실하기를 바랐다. 엄마는 엄마의 역할을, 아빠는 아빠의 역할을, 친구는 친구의 역할을, 애인은 애인의 역할을 내가 연출한 상황에 맞게 연기하길 바랐다. 나는 내 삶이라는 연극의 연출가이자 연기자였던 것이다. 이젠 더 이상 타인의 디렉팅에 따라 움직이고 싶지 않다. 나의 페르소나들도 모조리 벗어던지고 싶다. 화낼만한 상황이라는 확신 없이도 분노를 충분히 느끼고, 주위 반응에 대한 상상 없이 감정을 온전히 느끼고 싶다. 연기하는 삶을 그만두기 위해, 연기를 배우고 싶다.
단점을 장점으로
나는 감수성이 예민해 감정 기복이 심하고, 공감능력이 높아 타인의 감정에 지나치게 감정 이입하는 경향이 있다. 친한 친구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내 일처럼 마음이 아프고, 가족에게 속상한 일이 생기면 억장이 무너져 내린다.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성격이라면 다행이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렇지가 않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거절을 못해 난처했던 경우가 수두룩하고, 내 코가 석자면서 남 도와주겠다고 오지랖 부려 접시물에 코 박고 싶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연기에서는 나의 이런 성격을 장점으로 활용할 수 있다.
이미 나는 과몰입 장인이다. 연기력만 갖춘다면, 캐릭터에 빙의하는 건 시간문제다. 공감능력이 뛰어나니 나와 닮은 캐릭터를 연기한다면 위로와 공감도 얻을 수도 있을 테고, 정 반대되는 캐릭터를 연기한다면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도를 키울 수 있을 것이다. 평소 호기심이 많아 이쪽저쪽 기웃거리길 좋아하는데, 연기를 통해 일생동안 여러 회 차의 삶을 살아볼 수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흥미로운가? 인터넷으로 알아보니 연기수업을 들을 수 있는 원데이 클래스도 있고, 일반인들이 모여 연극을 하는 극단도 있단다. 기왕 세상에 던져진 거, 할 수 있는 거 다 해보고 떠나고 싶다. 그래야 아쉬움도 후회도 덜할 테니까. 그래서 나는, 연기가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