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와줘요, 홍반장!

태양의 후예, 시골에 전입신고

by 산골노마드

산골에 내려오면 조금은 여유로워질 거라 믿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모자란 기대였다.

산골에서 ‘여유’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부지런해야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구조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주말은 누구 이름인가? 성당에 가야 할 날이면 “아, 오늘이 일요일이구나” 하고 깨닫는다.


원해서 하지만 원치 않아도 N잡러가 되는 곳이 바로 이 산골이다. 전문가가 부족한 곳이다 보니 작은 기술이라도 부릴 줄 알면 선생님이 된다. 좀 더 나서서 함께 하게 되면 반장이 되기도 한다. 4년 차 우리 산골부부도 마찬가지로 여러 호칭을 가지고 산다. 선생님은 기본이고, 반장님, 팀장님, 대표님 등등 2년 차 때 토마토 농사를 지었었다. 그때 ‘땡양지 산골토마토’ 브랜드를 만들어 판매를 했더니 다들 땡양지 토마토 대표님이라고 부르더라. 사람들을 만날 때도 어떻게 부르지 고민말로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다 통한다. 이곳 산골은 그렇다.




산골에 내려와 가장 재미있는 경험은 바로 트레일레이스(산악마라톤)를 만드는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난 달리기를 즐겨하지 않는다. 군 생활 이후엔 산은 바라보는 곳이지 찾아가는 곳은 아니다는 마음으로 살았다. 그런데 산을 달리는 대회라니… 호기심이 생겼다. 그 대회를 주최하는 청년대표가 도와달라는 말에 흔쾌히 돕겠다 나섰다. 생각보다 산을 달리러 오는 선수들은 많았고, 대회를 운영할 스탭도 상당히 필요했다. 그래서 내 손길이 필요한 곳에서 열심히 일을 도왔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업이 되어 팀장까지 되었다.


대회날 나는 눈에 띄는 빨간 모자를 쓴다. 누구든 내가 필요한 사람은 내 모자 색을 보고 쉽게 나를 찾으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생각보다 빨간 모자가 잘 어울리는 듯해서 대회날엔 거의 빨간 모자를 고집했던 것 같다. 실제로는 모자가 많지 않아서 선택의 여지가 없이도 했다.


대회 때는 엑스포에 들어오는 스폰서 및 협력업체들을 돌며 간식과 물도 나누고 가장 중요한 식권을 나눠 드리며 인사를 나눈다. 처음엔 10개 정도 되는 업체들이 함께 했지만 이제는 30개가 넘는 업체들이 엑스포에 들어온다. 규모가 날로 커지는 엑스포 현장에서도 여전히 나는 식권을 들고 업체들을 하나하나 돌며 인사를 나누고 식당을 안내한다. 빠짐없이 안내하고 나면 오전 홍반장업무는 끝이 난다.


매인 스폰서 업체 담당자가 나를 부른다.

담당자 : "반장님, 저의 저녁에 맛있는 삼겹살이 먹고 싶은데요. 인원 많이 가도 되는 맛집이 있을까요?"

나 : "그럼요. 읍에 맛있는 식당이 있어요. 예약해 드릴게요. 몇 분 이서 가세요?"

담당자 : "감사합니다." 하며 엄지를 들어준다.

나 : "별말씀을요.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물어보세요." 살짝 윙크를 날려준다.

이렇게 사소한 것까지 안내햐야하나 싶지만 당연히 우리 집에 온 손님인데 친절하게 안내하는 게 나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하루 종일 대회장 전체를 둘러보며 부족한 건 없는지 불편한 건 없는지 살피고 한다. 대회장에 오는 많은 사람들의 비위를 다 맞출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하나라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내 선에서 해결하려고 하다 보니 종종걸음으로 다닐 수밖에 없다. 밥때를 놓치는 일은 당연하고 화장실 가는 법도 잊은 적이 많다. 누구 하나 나한테 지시를 한 적은 없지만 그냥 한다. 그래야 누군가는 덜 피곤할 테니까. 이렇게 뽈뽈뽈 다니는 내 모습을 보고 다들 홍반장이라 부른다. 난 박 씨인데 왜 홍 반장이라 부를까 잠깐의 의심은 들었지만 그냥 그러려니 지나친다.


우연히 (주)넬슨스포츠 회장님과 인사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회장님은 나를 보시더니 반갑게 인사를 건네셨다.

회장님 : “반갑습니다, 홍 반장님.”

나 : “안녕하세요, 회장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회장님 :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나 : “박은진입니다.”

회장님 : “박 씨인데 왜 홍 반장이라고 불립니까?”

나 : “하 하 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들 그렇게 부르니 그냥 그런가 보다 했어요. 대회장이 바쁘다 보니 이유를 물러볼 생각도 못했습니다.”

회장님 : “OOO팀장 왜 홍 반장인가?” 하고 관계자에게 물어본다.

관계자 : “홍반장님을 부르고 싶은데 성함도, 직함도 몰랐는데 매번 대회 때마다 빨간 모자를 쓰고 다니시는 모습을 보고 저희끼리 홍 반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회장님 : “참 재미있는 이름이군.”

나 : “덕분에 임팩트 있는 직함이 되었습니다. 감사드려요. 앞으로도 홍 반장 잊지 말고 찾아주세요.”

모두들 하하하 웃으며 그 상황을 마무리하였다. 그제야 나는 왜 홍반장이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다음번 대회에는 일부러 다른 색 모자를 쓰고 다녔지만 여전히 그들은 나를 홍반장님~~~~ 이라고 부른다. 어디선가 누군가가 무슨 일이 생기면 ‘도와줘요~ 홍반장’라고 부르면 난 여전히 달려가 일을 해결해 주었다. 그렇게 홍길동 아니 홍반장이 되어 여전히 대회장을 누비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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