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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Nov 16. 2022

나의 "없음"을 쓴다.

삶을 가꾸는 글쓰기 특강 #4

  온 세상이 만추의 색으로 물들고 있다. 늦여름에 시작된 글쓰기 특강도 끝을 향해 간다. 문우들과 함께 글을 쓰고 읽으면서, 가까운 사람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비밀을 나누었다. 인간이란 참으로 이중적이어서, 남에게 가장 밝히기 싫은 동시에 자기가 가장 쓰고 싶은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것이 본인이 제일 잘 쓸 수 있는  된다. 신형철 평론가의 말대로 글쓰기란 "나의 없음을 당신에게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의 가난이, 자식이 애를 먹이는 것이, 얼마 남지 않은 부모님의 시간이, 혹은 일찍 죽은 동생을 대신해 조카를 키워낸 것이 누군가에게 글의 시작점이 된다. 저마다 다른 삶의 모습만큼이나 글의 생김새도 모두 다르다.


  특히 인상적인 글 한 편이 있다. 40여 년 전 고입 체력장을 했던 날에 대해 쓴 글이다. 이 글을 쓰신 분은 집이 어려워서 중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검정고시를 쳤다고 한다. 그러니 학교 동창이나 학교 체육복은 이분의 "없음"인 것이다. 체력장을 치르던 날, 같은 학교 마크가 새겨진 체육복을 입고 서로를 응원해주는 '중학생'들 사이에서, 홀로 낡은 운동복을 입고 오래 달리기를 하는 이분의 모습이 글 속에서 생생하게 그려졌다. 어제 일어난 일인 것 마냥 체적인 묘사가 이 글을 읽고 있던 우리 모두를 40년 전 체력장이 치러지고 있는 어느 학교 운동장으로 데리고 갔다. 글 속 화자가 꼴등으로 결승선에 들어오는 장면에서는 모두가 탄식했다. 글쓴이가 당시에 느꼈을 소외감이나 부끄러움, 실망감 같은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분과 비슷한 연배이신 다른 어떤 분 자신도 분명히 체력장 세대인데, 이 글을 읽기 전까지 체력장에 대한 기억을 아예 잊고 지냈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40년 전의 일을 이렇게나 자세히 써냈다는 것에 감탄했다.


  글쓰기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글의 소재는 각인된 경험입니다. 40년 전에 겪은 일에 대해 이렇게나 자세히 쓸 수 있는 것은 그날의 서러움이 그 기억을 봉인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정말로 평범한 듯 흘러가버린 시간에 대해서 쓰는 것은 일주일 전 점심때 먹은 음식을 떠올리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구해내야 할 무엇이 있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것은 주로 '무엇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가지지 못했느냐'에서 온다. 그러므로 "없음"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글감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글감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다. ㅎㅎ)


  나는 종종 사람의 글이 나무의 나이테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나무는 햇빛과 영양분이 충분하면 나이테 간격이 넓어지고, 그렇지 못하면 나이테 간격이 좁아진다. 사람 역시 힘들고 어려울 때,  촘촘하고 세밀한 글을 쓸 수 있다. (읽기도 마찬가지다. 어느 유튜버의 말마따나 한 사람의 독서량은 그 사람이 풀어야 할 인생 문제의 수에 정비례하기도 한다.)


  글쓰기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적인 모험이다.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을 꺼내 스스로를 안전지대로부터 내몰고, 언어라는 불완전한 도구를 활용해 그 기억을 글로 구현해내는 도전이다. 무엇보다도 글을 쓰면서도 계속 드는 생각인 '도대체 내 글이 읽힐 만한 가치가 있을까'라는 다소 합리적인 의심을 극복해야만 한다.


  선생님이 글쓰기에 관한 명언 한 가지를 소개해주었다. 이 말은 신경림 시인이 했던 것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출처를 찾기가 어려웠다. (혹시 아시는 분은 댓글 부탁드려요.)


"글을 쓴다는 것은 부끄러움으로 체온을 말리는 작업이."


  나 역시 내 글이 부끄러워 온몸에 열날 때가 많다. 가끔 잘 쓸 때도 있고 자주 못 쓸 때도 있지만, 어떻게든 한 편의 글을 완성시킨 내가 참 좋다.


'잘하는 것보다 완성해내는 것이 더 낫다'는 이 말은 내가 글을 쓸 때마다 큰 용기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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