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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Nov 09. 2022

뜻밖의 행운, Serendipity

가장 격렬했던 위기의 순간에 찾아온 것

 

  '삶은 고통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삶이 끝나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고통도 함께 끝나는 거니까.' 만 32세의 나이에 유방암 판정을 받고 내가 나에게 건넸던 위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할머니가 되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슬프긴 한데 젊고 예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된다 생각하니 묘한 우월감도 들었다. 친구들은 나의 이 대책 없는 무한 긍정 사상을 '수여니즘'이라고 불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낙관주의라기보다는 오히려 ‘여우와 신포도’ 같은 방어기제였던 것 같지만 말이다.


  나는 아프지 않은 환자였다. 건강검진에서 우연히 내 왼쪽 가슴에 암세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수술 날짜를 잡았다. 멀쩡히 걸어서 수술실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바퀴 달린 침대에 실려 들어갔다. 내 몸에는 수술을 위해 그 전날 그려둔 사인펜 자국이 있었다. 내 왼쪽 손목에는 빨간 종이 팔찌가 걸려있었다. 이것은 의료진들 사이에서 내 왼쪽 팔이 보호되어야 함을 나타내는 일종의 신호였다. 주체성을 상실한 내 몸은 내 것인 듯 내 것이 아닌 거 같았다. 그날은 ‘몸’이라는 단어보다 ‘body’라는 영어단어가 더 가깝게 느껴졌다. ‘body’는 우리말로 ‘신체’와 ‘시체’라는 뜻을 동시에 가지는데 이런 생각을 하니 어쩐지 오싹했다.


  수술방에 들어가기 전 잠시 대기하던 곳에서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사이보그처럼 몸에 온갖 전선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생후 2개월 정도 된 아기였다. 아기의 엄마는 초록색 보호복을 입고 마스크를 낀 채 훌쩍였다. 아무리 달래도 아기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간호사는 “아무래도 배가 고파서 그런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수술 전 8시간을 금식해야 하니 2시간 간격으로 젖을 먹는 아기는 네 끼를 굶은 셈이었다. 얼마나 배가 고프고 힘들까. 아기가 수술을 잘 받고 건강하게 자라기를 빌었다. 내 코가 석 자인 상황에서도, 그 아기 걱정을 하는 내 모습이 웃기면서도 사랑스러웠다. 나 좀 오래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술을 마치고 2주간 6인용 병실에 입원해 있었다. 하루는 드레싱을 하러 갔는데 나와 같이 왼쪽 팔목에 빨간색 팔찌를 한 어떤 분이 치료를 받고 나오면서 펑펑 우셨다. 수술 부위가 잘 아물지 않아서 벌써 세 번째 재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그분께서 오히려 "예쁜 사람은 유방암 같은 거 안 걸리는 줄 알았는데"라며 나에게 농담을 던지셨다. 나는 옅은 미소로 응답했고 그분도 웃으셨다. 수술 후유증으로 힘든 상황 속에서도 웃음을 만들어내는 그분을 보며 나도 조금 더 씩씩해질 수 있었다.


  병실에 들어온 지 3일쯤 되었을 때 내 앞자리에 새로운 분이 오셨다. 그분이 "아, 더워"하며 쓰고 있던 가발을 벗으셨다. 항암치료를 하는 환자들에게 필수템이라는 뉴케어와 망고 통조림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모습이 병원 생활에 꽤 익숙해 보였다. 그러던 중, 교수님이 병실에 들어와 내 옆에 계신 환자분의 조직 검사 결과를 알려주셨다.

  "수술 전에는 1기로 보였는데, 전체 조직 검사 결과 2기네요. 항암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에 이분이 얼마나 마음이 쓰릴까 걱정만 했던 나와 달리, 내 앞자리에 계신 분께서 입을 떼셨다.

  "많이 놀라셨죠? 저는 3기예요. 저도 처음에는 항암이 되게 무서웠는데 해보니 할만하더라고요. 저는 항암 받으면서 애 둘 키우고 할 일도 다 하고 있어요. 마음 굳게 먹고 힘내셔요."

  본인이 더 심각한 상황임에도 처음 만난 사람에게 위로를 건네는 그분의 진심이 느껴져 내 마음도 덩달아 따뜻해지는 날이었다.


  퇴원이 가까워지며 병원 생활에도 차츰 익숙해지고 있을 때였다. 영화도 보고 책도 읽는 여유를 누렸음에도 나의 시간은 지겨울 만큼 남아돌았다. 그래서 병원에 있는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환자와 보호자, 의사와 간호사 외에도 병원에는 아주 많은 사람이 있었다. 간병인, 청소부, 의약품 관리하는 사람, 환자 침대 이동을 담당하는 사람 등. 나는 그분들이 몸서리치게 부러웠다. 학교에서 몰입해서 일하는 내 모습이 그리웠다. 두 번째 입대를 앞둔 가수 싸이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그때 싸이는 입대 전날 했던 콘서트에서 앵콜을 한 곡 더 하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가 됐다고 한다. 그래서 그 후론 늘 마지막 콘서트라 생각하고 본 공연보다 앵콜 공연을 더 길게 한다고 한다. 나도 일상으로 돌아가면 나에게 주어진 하루가 마지막 날이라 여기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영어를 가르치다 보면 우리말과 1대 1로 완벽하게 대응하지 않는 단어를 발견할 때가 있다. 그중, 나는 특히 'serendipity'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이것은 '페니실린'이나 '포스트잇'처럼 의도하지 않았는데 얻게 된 뜻밖의 행운을 의미한다. 어쩌면 유방암 또한 나에게 뜻밖의 행운(serendipity)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병을 통해 내 안에 있던 어떤 따뜻함을 마주했고, 나만큼이나 따뜻한 타인의 존재를 확인했고, '낙원은 일상에 있다'라는 진리를 깨달아 하루하루를 밀도 게 살게 되었으니 말이다. 특히, 시간의 유한함과 일상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한 뒤로 나는 하루를 아끼고 아껴 매번 마지막 콘서트를 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철학책에서 읽었던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라틴어의 교훈과 르네상스의 거장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이라는 그림에 그려진 해골의 의미가 내 몸에 각인된 느낌이다.


한스 홀바인 <대사들>

   

  가끔 나에게 불행한 것처럼 보이는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한 단어를 떠올린다. serendipity. 나 자신에게 주문이 된 이 단어를 마음속으로 읊어본다. 최대한 혀를 꼬아 우아하지만 굳건하게 되뇐다. serendipity. 그러면 불행은 변장을 벗고 행운이 된다.


  '삶은 고통이다'라는 명제가 참이라면 이 명제의 대우인 '고통이 없으면 삶도 없다'도 참이다. 나는 뜻밖의 행운이 된 나의 고통을, 남들과 다른 내 왼쪽 가슴을 사랑한다.


어제 장거리 운전 중 하늘이 내게 준 serendipity



  

  글쓰기 수업 과제로 <내 인생에서 가장 렬했던 위기의 순간>에 대해 쓴 글입니다. 혼자 간직할까 했지만 글쓰기 선생님과 문우들의 칭찬에 힘입어 브런치에 올려봅니다.


  수술한 뒤로 시간이 제법 흘렀기에, 매우 담담하게 쓴 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앞에서 소리 내어 읽으니 눈물이 나더군요. 저도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어요. 쓰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조금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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