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 금진 2

1990년, 속초로, 산호야 안녕

by 소설 쓰는 라떼

사흘이 지났다. 엄마를 기다리는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뜨거웠던 이마는 차갑게 식었고 먹은 것 없이 볼일도 보았다. 지금부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주인 할아버지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거실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114에 전화를 걸어 속초 해물찜을 물었다.

-거기 속초 해물찜이지요?

-니 누구나?

나는 얼마간 대답하지 못했다.

-누구나? 전화를 했으면 말을 하오!

나는 용기를 내서 제법 야무지게 대답했다.

-싫으시겠지만, 고모가 나를 좀 데리고 가줘야겠어요

일 년 전, 엄마의 손에 이끌려 속초 해물찜에 간 적이 있었다. 속초항을 등지고 위치한 식당은 먹자골목에서 제법 장사가 잘 되는 편이었다. 엄마와 고모는 무슨 이야기를 싸우듯 큰 소리로 주고받았는데 지 엄마가 키워야지 왜 이리로 데리고 왔냐는 고모의 말을 들어서는 아마도 엄마가 나를 맡기려고 한 것 같았다. 결국, 고모는 엄마에게 돈 봉투를 쥐어주며 빨리 가달라고, 가서 잘 살라고, 가서 다신 오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그런 고모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가 집을 나간 사정을 또박또박 설명했다. 고모가 요리하는 해물찜 양념 같은 매운 한숨이 수화기를 타고 전해졌다. 고모는 속초 터미널에 와서 다시 전화하라는 말만 하고 먼저 전화를 끊었다. 나는 속초를 가려면 얼마가 있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 주인집에 물으러 갔다가 그러기를 포기했다. 혹시 내가 속초로 간 것을 알면 빚쟁이들이 고모에게까지 찾아올 것 같아서였다. 나는 학교 앞에서 산호를 기다렸다. 산호는 나를 보자마자 결석까지 하고 그동안 뭐 했느냐고 야단쳤다. 나는 산호에게 쉿, 하고 조용히 하라는 몸짓을 취했다. 그리고 산호를 데리고 골목길로 가서 그간 있었던 일과 내가 속초로 가야 하는 사정을 설명했다.

-비밀이다, 산호야, 이건 니하고 나만 아는 일이다. 알았나?

산호가 주변을 살피고 고개를 끄덕였다.

-산호야, 혹시라도 니네 엄마가 우리 엄마랑 연락하면 나는 속초로 갔다고 말해줘야 한다

알았지?

-우리 엄마가 니네 엄마를 얼마나 싫어하는데 연락을 하겠나?

-그렇겠지? 그래도 혹시라도 산호야.......

-알았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잠시 후, 산호가 다시 나타났다. 멀리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산호....... 산호를 볼 날이 언제가 될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밀려왔다. 산호는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 원짜리 한 뭉치를 쥐어주고선 빨리 가라며 내 등을 떠밀었다.

-어디서 났는데?

-저금통 털었다 지지바야, 이 지지바는 내 고생만 실컷 시키고 간다.

내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한데 산호는 전혀 울지 않았다. 나는 산호에게 울먹이면서 사과를 했다.

-산호야, 니 어제 우리 집에 와서 나 불렀지? 못 들은 척해서 미안. 집에 아무도 없는 척하느라고.

-가서 전화도 하고 해라 니

-산호야 내가 나중에 산호태권도 꼭 찾아갈게 기다려라

-나중에 언제?

-글쎄....... 빚쟁이 아저씨들이 내 얼굴 까먹을 때까지

그렇게 산호의 도움으로 속초행 버스에 올랐다. 얼마 전, 산호와 버스를 타고 강릉으로 갔던 일이 떠올랐다. 학교에서 단체로 가는 서커스 관람에 내가 가지 못하자 산호가 따로 나를 데리고 버스를 탔다.

-니는 어떻게 이런 데 다 아나?

-엄마가 가르쳐 주니까 알지

단오장을 찾은 사람들이 동춘서커스단의 쇼를 구경하고 있었다. 우리는 깔아놓은 자리에서도 밀려나 맨 땅에 털썩 앉아버렸다. 나는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본 적이 없었고, 살구색 타이즈를 입은 여자들이 공중돌기를 하는 것 또한 들어본 적도 없었다. 산호는 아이스박스를 목에 걸고 구경꾼 틈을 비집고 다니는 아주머니에게 가서 200원을 내밀었다. 우리는 한 손으로 싸구려 하드를 입에 물고 남은 한 손으로는 서로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손을 잡았다. 내가 공중 곡예를 보고 연신 감탄사를 뱉어내자 산호가 말했다.

-야, 저 누나들은 맨날 식초에 밥 말아먹는다, 니 맨날 식초에 밥 말아먹을 수 있나?

나는 하드를 입안에서 굴리며 고개를 저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산호는 그만 잠에 곯아떨어졌다. 그때 산호의 얼굴은 용맹스러운 호랑이라는 의미를 가진 남산호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게 연약한 강아지 같았다. 나는 속초로 오는 내내 산호와 엄마를 번갈아가며 생각했다. 열 밤만 지나면 데리러 오겠다는 흔한 대사 한마디 남기지 않은 엄마는 어디로 갔을까? 산호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속초 터미널에 내려 택시를 탔다. 그리고 속초 해물찜 근처에서 산호가 준 돈으로 택시비를 계산했다. 비슷해 보이는 음식점들이 줄지어 늘어선지라 처음엔 고모가 말했던 용강슈퍼에서 왼쪽으로 꺾자마자 바로 첫 번째다, 한 말이 이 방향인지 저 방향인지 헷갈려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잘 참고 왔는데 왜 갑자기 여기서 눈물이 쏟아지는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고모 앞에서 절대 울지 말고, 약해 보이면 안 된다고 마음을 챙겼다. 내가 한 군데 서서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자 몸집이 제법 큰 아주머니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분명 나에게 오는 듯했다. 설마, 얼마 전 엄마에게 해코지를 하고 갔던 검은 드레스가 이곳에서 빨간 앞치마를 하고 있지는 않을 터였다. 나는 조금 무서워졌다.

-니 안 기어 오고 뭐 하고 자빠졌나 거기서

고모였다. 일 년 전쯤 엄마와 함께 분명 고모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봤던 모습이랑 많이 달라진 듯했다.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때 고모의 얼굴은 길쭉했다거나 갸름했던 쪽이었다.

-그 미친년이 나한테 가라고 일러주더나?

-아니요

-주둥아리 집어넣지 못하나?

나는 고모의 뒤꽁무니를 쫓아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추석이 다가오는 가을 날씨는 아직 여름 같았다. 고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홍합이 들어간 뿌연 국물의 미역국과 달걀말이, 그리고 깍두기를 반찬으로 내주었다. 매번 내게 입이 짧다며 핀잔을 주던 산호가 우걱우걱 밥을 떠먹는 이 광경을 본다면 뭐라고 할까. 나는 산호에게 보낼 편지에 쓸 이야기들이 많아질 것 같아 잠시 웃음이 났다.

-니 우짤라고 여까지 왔나

-엄마가 당분간 여기서 학교 다니고 있으래요

-뭐라?

-여기 전화번호도 엄마가 써놓고 간 거예요

나는 약간의 거짓말을 보태 그간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엄마가 찾으러 올 때까지 이곳에 있겠노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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