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를 잃은 길가메시는 영원히 살고 싶어 했다. 죽지 않는 비밀을 찾아 험난한 여정을 거쳤지만 결국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깨달았다. 불로초를 찾아 떠난 서복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영원불멸을 꿈꾸던 진시황은 그것을 기다리다 영면했다. 3년 고개에서 넘어진 노인은 일부러 몇 번을 더 넘어졌다. 오래 살기 위해서였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은 마음은 인간의 본능이자 소망일지도 모른다.
1년 전, 봄에 있었던 일이다.
공원 벤치에 앉아 있노라니, 가까이 붙은 옆 벤치에서 노인 두 분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형님, 오랜만에 나오셨네, 하는 말소리로 보아 햇빛 마실 나올 적에 만나 친해진 동네 친구 같은 관계로 보였다. 그때야 완연한 봄날이라 날씨가 좋았지만 장마엔 장마라서 못 나올 테고, 30도가 넘는 더위엔 더워서 못 나올 테고, 겨울은 겨울이라 그렇고 할 테니, 일거리 없는 노인들이 잠시 바깥으로 나와 소통할 수 있는 기간이라고 해봐야 봄, 가을의 한두 달 정도밖에 되지 않을 터였다. 해와 바람도 느끼면서 사람과 더불어 소소한 일상을 나눈다는 건 귀찮은 게 아니라 참 행복한 일이구나, 나는 그게 귀한 줄도 모르고 사람을 피해 다니고 살지 않았는지 반성에 가까운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한 할머니께서 갑자기 일어나더니 내 자리로 몇 발자국 옮겨왔다. 그러고는 내 자전거를 뚫어져라 살폈다. 무릎 관절을 구부려 아래에서 위로, 옆에서 옆으로 찬찬히 살피고 계셨다.
-할머니, 그거 제 자전거인데 왜 그러세요?
내 자전거가 무슨 문제라도 된 건지 의아했다. 할머니는 자전거가 내 것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굽혔던 무릎을 폈다.
-아 자네 거야? 난 또 그 할아버지 것인가 하고. 어 그래, 그래
그러고 나서 할머니는 함께 있던 다른 할머니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 할아버지 이제 안 나오는 거 보니, 죽었나벼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할머니가 말하는 ‘죽었나벼’에서는 어떤 안타까움도 아쉬움도 없었던 것이다. 자주 보던 햇빛 마실 친구가 죽었는데 단지 죽었나 보네, 하고 말아 버리는 말투가 조금 이상하게 들렸다. 할아버지가 죽은 게 틀림없다고 확신에 찬 할머니의 말을 전해 들은 다른 할머니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히 대답했다.
-어어, 죽었지 그럼, 죽었고 말고.
그렇게 두 노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아무렇지 않게 오갔다.
-아유, 부러워, 부러워
-죽고 싶어도 못 죽어서 어떡해
-그러니까, 사람이 죽는 복이 진짜 최고야
-오래 살아봐야...... 폐만 끼치지
-여기저기......
더 사는 일은 넌덜머리 나는 일이야,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생의 유한함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죽음을 복이라 말하는 사람도 본 적은 없어서 당혹스러웠다. 호상을 치렀다는 말도 건강히 오래 살다 평안하게 가셨다는 의미이지, 죽어서 복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연명치료보다 삶을 정리하는 시간이 훨씬 중요하다는 화두가 주변에 퍼지고 있었다. 그래서 ‘웰다잉’이라는 말도 한때 유행처럼 번졌던 시기가 있었을 것이다. 5년 전인가, 한 매체를 통해 죽음의 문턱 앞에서도 독서 모임을 이어가던 한 청년의 아름다운 장례를 보았다. 아주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 혹은 어떻게 죽어야 할까. 나아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먼저 놓아줄 수 있을까.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살아있는 동안 따뜻한 친구가 되고, 성숙한 어른이 되고 싶다고 다짐했었지만 그러한 다짐 안에는 죽으면 ‘이 세상’은 끝이라는 전제가 깔려있었다. 죽음을 끝나는 것으로 여긴 나는 아직 붙잡을 것들이 많은 모양이다.
이젠 살 만큼 살았으니 죽고 싶다고, 죽는 게 복이라고 말하는 두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란 느낄 수 없었다. 생을 향한 열정이 모두 소진된 노인들이 안타깝기만 했던 이유는 더 나아질 것이 없고, 이젠 쓸모가 없으니 가는 게 옳다고 여긴 절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할머니들의 체념이 과연 슬픈 일인지 골똘하다가 다시 그 체념은 정말 절망인지 되묻게 되었다.
하루의 해가 넘어가듯 삶을 거의 다 살아낸 이들의 순응은 아닐까?
아이가 말했다. 엄마는 삼 년 고개를 만나면 100번을 넘어져야 한다고 했다. 엄마가 천 살까지 사는 게 소원이라고 하던 순수한 생의 욕망이 질풍가도의 시간 속에 살고 있었다. 멀지 않은 산책로 끝에서 아이가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엄마를 보고 함박웃음이 핀 채 쉬지 않고 달리는 아이는 수영장에서 막 나오는 길이었다. 엄마 품에 안길 생각을 하니 저렇게도 좋을까. 건강에 도움이 되라고, 생존에 필요할 수 있다고, 나아가 인생을 재밌게 살아보라고 배우도록 한 운동이다.
할머니들과 나, 그리고 아홉 살 된 아이는 ‘생’이라는 수직선 위에 있는 듯했다. 세상의 문을 박차고 나가려는 아이와 긴 여정을 마치고 그 문을 닫고 싶어하는 노인들이 나를 사이에 두고 극단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