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 '무지', 생명의 권면을 끝내 무시하다
# 날짜: 2026년 3월 15일
# 독서 시간 : 40분
# 분량: ~279쪽/ chapter 10 - '무지', 생명의 권면을 끝내 무시하다: 선과 의, 두려움, 옛 삶
# 이 글은 한 평범한 생활독자가 읽고 이해한 범위 안에서 찾아 정리한 개인적인 기록이다. 물론, 신앙인으로서 읽은 감상도 일부 담겨 있다.
- 크리스천과 소망은 마법의 땅, 평지를 걸으며 앞서 잠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무지'를 재회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때때로 크리스천이 말로 시비 아닌 시비를 거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는데, 그만큼 크리스천의 '단호함'과 '분별함'을 분명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크리스천의 논쟁적 태도는 타협할 수 없는 진리에 맞서는 것이었다. 마침 요한복음을 필사하며,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내세우는 유대인들의 영적 교만을 향해 군더더기 없는 말씀으로 깨트리시던 예수님을 마주하고 있었다. '무지'에게 단호한 크리스천의 모습도 겹쳐졌다.
크리스천은 다시 만난 '무지'에게 영혼의 상태, 하나님과의 관계를 묻고, 무지는 자신이 선한 생각을 하며 천성을 갈망하기에 아주 좋다는 대답을 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선한 생각'에 관하여 설전이 벌어진다.
'무지'는 천성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고, 율법에 순종하고, 종교적인 행동들을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겨주실 거라 믿지만 크리스천은 우리가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 말씀과 일치하는 자신에 관한 선한 생각이며, 어려서부터 사람은 악하다는 말씀, 즉 성경의 판단과도 일치하게 생각하는 것이 선한 생각이라고 반박한다.
무지는 '스스로 노력도 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해 주신 일을 믿기만 하면 의로워진다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 논리라면 제멋대로 살 게 뻔하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은 그런 무지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믿어 구원받는 믿음은 그런 결과를 낳지 않기에 무지는 이름과 정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한탄한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태복음 11장 27절
소망과 크리스천은 무지에게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적이 있는지 궁금해한다. 무지는 이에 대해, 계시 또한 허무맹랑하다 여긴다. '선생님들처럼 온갖 잡다한 교리'가 없다고 하여 자신의 믿음이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되받아치는 것이다. 그런데 무지가 계시를 잡다한 교리로 치부하는 태도는 자신의 행위로 의를 내세우는 오만함과 어떻게 맞닿아 있을까? 연결이 될 듯 말 듯...... 질문은 났는데 답이 나지 않았다. 얄팍한 사고의 한계로는, 무지의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과 본인이 쌓아 올린 공든 탑만 증거가 되기 때문에 신의 계시 현상 같은 것은 있을 수 없고, 스스로 꼬박 저축한 행위들이 더 빛나야 하기 때문이 아닐지......
무지와 떨어진 두 사람은 한때 꽤 지각이 있던 '잠시'라는 인물을 떠올리며, 왜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변해서 옛 삶으로 돌아가는지 각자 의견을 나눈다.
인간은 죄에 대한 자각과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거룩한 두려움을 견디기보다 인간적 두려움에 더 반응한다. '지옥 불길의 두려움이 조금만 가라앉아도 금방 딴마음을 품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이다. 죄책감이나 두려움은 괴로운 일이므로 서서히 억누른다.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직면하기 싫다. 또한, 경건한 사람의 허물을 보면 더 대담하게 방탕한 대화를 주도한다. 그러다 '대놓고 작은 죄들을 저지르기 시작'하여 갈수록 '철저히 완악해진다.' 그렇게 찰나의 평온에 마음을 쏟을수록 인간은 가장 익숙한 '옛 삶'으로 도피하고 만다.
그러고 보면, 변심은 우연이 아니다. 아닌 척하면서 나쁜 쪽으로 꾸준히 마음을 쓴 결과다.
사람들은 흔히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라고 말한다. 나도 삶의 순간순간에 자주 사용하는 말이기도 하다. 요즘의 나는 어느 쪽을 향해 성실하게 움직이고 있는가. 고단함을 핑계 삼아 안주하고 있는 나의 도피처는 과연 어디이고,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