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시절, 동료들과 회사 뒤편 경양식 집에 자주 들렀던 기억이 난다. 세련미 넘치는 인테리어는 아니었지만 소박한 가정집에 들어온 듯한 편안한 인상을 주는 식당이었다. 주인아주머니는 갈 때마다 매번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맞아 주셨고, 테이블에 정갈하게 놓인 식기들은 이곳의 음식이 얼마나 깔끔하게 조리되어 나올지 짐작이 갈 정도로 반들거렸다. 식전빵과 옥수수 수프가 나오면 오전의 허기가 어느 정도 메워지며 메인음식을 기다릴 여유를 만들어 주었다. 잠시 후 브라운소스를 올린, 바삭하게 튀겨진 돈까스가 담긴 하얀 플라스틱 접시가 테이블 위에 놓인다. 칵테일후르츠 통조림, 통조림 옥수수, 사우전아일랜드 드레싱이 뿌려진 채 썬 양배추 샐러드를 보니입가에 미소가 절로 번진다.직장생활에서의 유일한 낙인 점심시간을기꺼이 투자할 만큼, 이곳은 가치 있고 기다려지게 만드는, 그런 의미가 있었다,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기억의 저편으로 희미해져 버린 추억의 경양식집은 3년 전 이 책을 만나며 다시금 소환할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 서점을 뒤지다 우연히 발견한 '경양식집에서'란 책은 사실 평소 맛집이나 음식에 크게 관심이 없는 내가 구입할 만한 분야는 아니었다. 게다가 실제로 내용 구성이 어떻게 짜여 있을지, 안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살 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따져 보지도 않았다는 것이 아직도 신기하다. 그냥 운명처럼 그댈 만나듯 운명처럼 이 책은 우리 집으로 배송되었다. 작가는 피아노조율사로 전국 출장을 다니며 그 동네의 경양식집을 찾아 식사를 하는 소박한 취미를 가진 분이다. 본인의 본업과 취미를 가지고 책을 출판하셨다는 점이 글을 쓰는 입장이 되니 부럽기도 하다. 직접 사진을찍거나 그때의 상황을 만화로 재현하고, 식당의 주인(셰프)들을 인터뷰한 내용들을 실어다채로운구성이다.이번 글에선 총28개의 식당 중 내가 실제로 가보고 싶은 Top5 식당을 추려 보았다. 혹시 근처에 살거나 이 글을 읽고 꼭 가보고자 하시는 분이 있다면 맛있는 식사를 하실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
첫 번째로, 경기도 광명의 돈까스 정식집 '라임하우스'는 76년에 요리를 시작해 호텔에서 일을 하시다 99년에 지금의 식당을 개업해 20여 년째 운영을 하고 계신, 노부부의 터전이다. 초창기에는 호텔식으로 음식을 내시면서가격은 5천 원만 받았다고 하신다. 음식에 비해 가격이 너무 싼 것 아니냐고 물으니 부부가 좀 덜 가지고 가면 된다 하신다. 오히려 음식 맛, 위생, 청결을 우선으로 여기는 모습에서 선한 마음씨와 셰프로서의 사명감도 느껴져 더욱 식당에 대한 신뢰감이 들었다. 특히나 식전에 나오는 식전주(포도주)는 음식의 맛을 돋우기 위해 조금 주신다고 하는데, 슈퍼에서 구입해 집에 가서마시면 왜 식당처럼맛있지 않냐고 손님들이 신기해한단다. 식전주는 조금 마셔야 맛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특이한 점은 이 식당은 김치를 주지 않는다. 김치는 맛이 세서 메인 음식 본연의 맛을 잘 느낄 수 없기에 김치가 어울리는 음식이랑 먹어야 좋다는 것이다. 역시 김치에는 라면인 건가. 작은 돈까스 2조각과 치즈를 올린 함박 한 조각이 소스와 함께 놓이고 접시 한편에는 소스에 버무린 펜네 파스타와 절인 오이, 옥수수 통조림, 밥이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지금도 반백의 사장님과 서빙을 하시는 사모님이 계속 운영하고 계실까. 꼭 이곳에 방문하고 싶어 일전에 휴대폰에 리스트업 해두었는데 이 글을쓴 계기로 조만간 가봐야겠다.
돈까스 정식 @라임하우스
두 번째는, 대전 은행동의 '아저씨 돈까스'인데 5,500원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중앙시장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어가는 길에 볼거리가 많아 지루하지 않아 금세 찾을 수 있는 위치라 하니 걷는 것 싫어하는 나도 가볼 만한 거리겠구나 싶다. 잘 익은 깍두기와 단무지를 반찬으로 하고 따끈한 수프에 위를 따스하게 코팅하고 기다리다 보면 돈까스 한 장, 밥과 야채샐러드, 마카로니 샐러드가 하얀 접시에 세팅되어 나온다. 비록 빵이 나오지는 않지만 돈까스와 밥만으로도 충분히 배가 부를 정도의 많은 양이라 저렴한 가격이라는 게 새삼 느껴진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내가 회사 다니던 시절 그 돈까스 정식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어 반갑고도 그리운 차림이었다. 대전까지 가야 할 핑계를 만들어야 할 텐데 궁리 좀 해봐야겠다. 그전까지 사장님, 계속 운영해 주세요.
돈까스 @아저씨 돈까스
세 번째는 인천 부평동의 '웨스턴 스테이크'라는안심스테이크집으로 20년 전부터 중년의 부부가 운영하는 곳이다. 차림표에 돈까스와 생선까스는 없고 소고기와 삼겹살, 치킨을 스테이크 형태로 내어주는데 우리나라의 경양식집들이 대부분 일본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곳은 미국 스타일이 진하다. 뜨겁게 달군 철판에 안심 스테이크와 옥수수를 올리고, 오븐에 구운 감자, 구운 버섯, 방울토마토, 초록색 브로콜리 그리고 아이스크림 스쿠프로 떠 놓은 밥까지, 간결하지만 구성이 완벽한 모습이다. 겉은 바삭하고 안에는 육즙이 갇혀 있는 안심. 감자에 십자로 칼집을 내고 그 위에 옥수수를 올려 오븐에 구운 것도 별거 아닌 듯하지만, 음식의 영양소를 배려한 듯 각자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고 말하는 부분은 저자의 미식가 다운 모습이 엿보이는 구절이었다. 치킨 마니아로서 요 스테이크는 탐나는구먼.
안심 스테이크 @웨스턴 스테이크
네 번째는, 1997년에 개업한 경기도 수원의 '케냐'경양식집인데 상호명이 케냐인 이유는 주인 부부가 케냐에 살다가 한국에 와서 친형이 운영하던 가게를 맡으며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생선까스 3조각, 양배추 샐러드와 옥수수, 마카로니 샐러드, 스쿠프 밥이 한 접시에 나온다. 잘 튀긴 생선까스와 타르타르소스가 잘 어우러지고 경양식의 필수, 깍두기도 잘 익어 입에 잘 맞는다는 구절에서 입맛이 쓰윽 다셔진다. 얼마나 개운할까. 후식으로 나오는 커피는 사장님이 직접 로스팅하신다는데 워낙 커피가 유명하다니 식당에 들르면 꼭 마셔봐야 할 것 같다. 무척이나 친절하고 편안한 경양식집이라 근처에 일이 있으면 꼭 다시 들러야겠다는 저자의 말에 솔깃해진다. 우리 집에서 수원은 그리 멀지 않으니 말이지.
생선까스&케냐커피 @케냐
마지막으로는, 서울 예장동의 '그릴데미그라스' 비프까스와 함박스테이크 집이다. 식전으로 나오는 동그란 빵을 갈라 마요네즈로 감싼 포슬포슬한 감자 샐러드를 안에 넣어 먹는 독특한 방식이지만 담백함이 가득. 비프까스는 손바닥만 한 소고기 튀김 2장과 소스, 잎채소 샐러드가 별도로 나오고 고기는 아주 부드러우며 곁들여 나온 가지는 재료 본래의 단맛이 도드라진다. 튀겨서 나온 고기는 질길 텐데 조리 비법도 궁금하다. 두툼한 함박스테이크는 위에 올려진 달걀과 함께 자르니 육즙이 촉촉해 아주 부드럽고 소고기 함유량이 절대적이라고 하는데, 이것 하나만 먹어도 속이 든든하겠다는 생각에 아이에게 먹이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 저녁에는 단골들을 위해 경양식 오마카세를 운영하시며 병어를 조리거나 다양한 안주를 만들어 주신단다. 나도지인들과 소박한술잔을 기울이며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상상을 잠시해본다.
함박스테이크&비프까스 @그릴 데미그라스
경양식집의 주인들은 하나같이 요즘 친구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금세 나간다고 이야기하신다. 조리경력 1년쯤은 돼야 일을 맡길만한 상태가 되는데 준비할 것, 많은 그릇과 설거지, 힘든 서빙 그리고 가격이 비싼 양식도 아니다 보니 대부분 부부가 운영할 수밖에 없다 하셔서 마음이 아프다. 큰 수익이 나지 않고 사회에서도 경양식의 가치를 그다지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말도 참 안타깝고. 수프 한 가지, 소스 하나도 시판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연구하고 개발해, 손님께 내었을 때 부끄럽지 않을 만족할 만한 퀄리티로 만들겠다는 주인의 선명한 소신이 다소 가벼이 여겨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테리어, 벽지, 식당에 울리는 배경 음악의 선정까지도 주인장의 철학과 메시지가 담긴 것들일 텐데 나부터라도 기억하고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두툼한 안심, 등심을 바삭하게 튀겨내 쫄깃한 우동과 함께 나오는 돈까스만이 정식의 전부가 아니라 흰 접시에 오밀조밀 담긴 반찬들과 함께나오는 돈까스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정식임을 아이에게도 다시금 설명해 주어야겠다.
부디 경양식집을 운영하시는 분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지치지 않고 꾸준히 그 명맥을 유지해 나아가주시면 참 좋겠다는 작은 바람이,그저 바람으로만 그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