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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봄 Apr 25. 2024

읽지 않는 책을 읽는 것에 대하여


도서관의 서가는 십진분류법에 따라 철학, 언어, 예술, 문학 등 주제별로 책을 나누어 각 분류에 맞게 꽂는다. 청구기호만 검색하면 수많은 책들 가운데 내가 찾는 책을 손쉽게 찾을 수 있다. 반면 우리 집의 책장은 소유한 책이 그리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명확한 분류 기준 없이 마구 뒤섞여 있다. 한꺼번에 꽂아놓은 아이의 전집류를 제외하고는 그때그때 빈자리가 있으면 마구잡이로 책을 꽂은 탓이다. 책 외에도 오래된 보험 증서며, 가끔 열어보고 싶어도 너무 높이 꽂혀있어 손이 닿지 않는 웨딩앨범, 아이의 철 지난 작품집 등 책의 형태를 가진 온갖 잡동사니가 출근시간대 콩나물시루 지하철처럼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하지만 이 대혼란의 책장 속에서 청구기호가 붙어있지 않아도 눈에 유독 잘 들어오는 책들이 있다. 여기저기 흩어져있지만 하이라이트를 칠한 것처럼 존재감을 내뿜는 책들의 정체는 바로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다. 책장 한 구석에 읽지 않은 채로 숙제처럼 쌓여있는 책들. 누가 제발 사라고 등 떠민 것도 아니고, 순전히 내 의지로 정말 읽고 싶고 소장하고 싶은 마음에 척척 카드를 긁어 기껏 사놓은 이 책들을 왜 읽지 않고 곱게 꽂아만 놓고 있을까. 공교롭게도 읽지 않은 책들의 상당수가 두꺼운 분량을 자랑하는 소위 ‘벽돌책’들이다.




같은 책 두 권이 쌓여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 768쪽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사람으로서 하루키의 신간이 나왔을 때 구입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망설임 없이 서점에서 집어든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하루키의 소설은 페이지가 많아도 술술 잘 넘어가고 이전에도 이 책과 비슷한 두께인데 2권으로 구성된 벽돌책 <기사단장 죽이기>를 이틀 만에 독파한 전력이 있어 이 책은 하루 만에 다 읽겠지 싶었다. 하지만 구입한 당시 갑자기 바쁜 일들이 생겨 표지조차 못 넘긴 채 책장에 일단 꽂아두었는데, 얼마 후 똑같은 책이 또 한 권 생겼다.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한다는 걸 아는 직장 선배가 선물로 주신 까닭이다. 평소 나의 선호도를 주의 깊게 관찰해서 맞춤형 선물을 해 주신 선배에게 감사드리는 마음에 선배가 사준 책은 간직하고, 내가 그전에 구입했던 한 권은 주변에 필요한 사람에게 나눔을 해야지라고 생각했건만 아직 나눔도 실천하지 못했고 나란히 두 권을 꽂아놓은  한 장도 넘겨보지 않았다. 이러고도 하루키의 팬이라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 싶지만, 하루키 씨 당신의 재기 넘치는 문장을 사랑해 마지않습니다. 나도 왜 이 책은 펴보지 않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문과 여자의 무모한 도전,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 719쪽

중학교 시절부터 수포자, 과포자로서 문과 외길인생을 걸어온 내가 심오한 우주 공간에 도전할 생각을 한 것은 과욕이었을까. 문이과를 막론하고 독서가의 책장에 어김없이 꽂혀있다는 책, 난해하고 심오한 원리를 이해하기 쉽도록 알려주는 아름다운 과학책이라는 경탄에 홀려 겁도 없이 덜컥 구입한 과학 교양서의 고전. 책 안에 사진도 많다던데, 읽어보면 우주의 경이로움에 할 말을 잃게 된다고 하던데, 뼛속까지 문과 여자로 살아온 내가 이 책의 책장을 넘기려면 아직 문과 때를 좀 더 벗어야 하나보다. 책장 한 켠에서 항상 날 웅장하게 내려보는 코스모스의 세계를 영접할 때가 언제일지, 그때가 되면 우주의 신비가 풀리려는지 모르겠다.



Beatrix potter, The Complete Tales / 400쪽

언제 구입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표지와 내지 곳곳에 사랑스럽게 자리 잡은 토실토실 깜찍한 피터래빗 일러스트에 반해 꽤 비싼 가격을 지불하고 산 원서다. 영어공부도 할 겸 매일 조금씩 읽어야겠다는 마음으로 구입했는데, 아기자기한 그림만 보고 꺄아 꺄아 귀여워~를 외치고 줄글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책장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를 잡은 후 방치되어 있었다. 마법에 걸린 공주처럼 사람들의 눈이 잘 닿지 않는 곳에서 잠만 자고 있던 이 책은 나의 아들이 행운의 주문을 걸어 오랜 잠을 깨워주었다. 아이가 동네 화단에서 찾은 네 잎 클로버를 끼워서 말릴 '적당히 두껍고 잘 안 보는 책'에 당첨된 것이다. 아가의 작은 손가락으로 살금살금 책 속에 끼워 놓은 네 잎 클로버, 클로버를 안고 다시 마법에 걸려 잊혀 있던 이 아름다운 원서는 '작가들의 책장' 매거진 글을 작성하다가 문득 생각이 나 또다시 긴 잠에서 깨어났다.


 4년 정도 되었을 것 같은 클로버는 여전히 부서지지 않고 잘 간직되어 있었다. 사랑스러운 책아, 앞으로도 클로버를 품고 내 아이의 행운을 빌어주렴.



신간 도서 발행 통계*를 참고하면, 평균적으로 연간 8만여 권에 달하는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매일 한 권씩 꼬박꼬박 읽는다고 해도 1년에 최대치로 읽을 수 있는 책은 365권, 새로 나오는 책의 1%도 채 소화하지 못한다. 이미 기존에 발간된 도서들을 제외하고 신간만 기준으로 따져봐도 이러한데, 누적된 책의 양을 감안하고 실상은 1주에 1권도 채 읽지 않는 날도 많은 점을 생각해 보면, 인생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은 온 우주의 먼지 티끌만큼도 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온 세상에 널리고 널린 수많은 책들 중 극히 일부만 볼 수 있는데, 집 안에 안 보는 책 좀 있으면 어떠냐는 핑계를 이렇게 긴 글로 주저리주저리 쓰고 있다는 이야기다.




*통계 참고 :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출판산업 동향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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