꿍따리 샤바라 빠빠빠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진심 가열하게 놀았다. 전시회, 놀이공원, 뮤지컬, 서점, 박물관, 쇼핑센터, 도서관 등 하루가 멀다 하고 여기저기를 쏘다니며 보고 듣고 느끼고 배웠다. 내 머릿속에 저장, 내 가슴속에 간직. 배가 고파지면 근처 식당에 들러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겼다. 그렇게 엄마와 딸은 서울시내와 근교를 신나게 누비고 다녔다. 아이들이 학원에 가 있을 오후 2-6시에는 시아 또래 친구들은 거의 볼 수 없었다. 이러고 다니는 우리가 이상한 거냐, 열심히 공부하는 그들이 잘못된 거냐 서로에게 물어봤지만 정답을 낼 수 없는 무의미한 질문일 뿐. 단지 내일 당장 수능시험을 치를 것도 아닌데 초등학생 때 이렇게 놀러 다닌다고 뭐 그리 조급해할 필요가 있나 싶은 쪽이랄까.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니 이전보다 말이 더 잘 통하고 대화도 훨씬 쫀득하니 재밌어지는데 이렇게 생기발랄한 8살 아이에게, 딱딱한 책상 앞에 묶여 기계적인 문제집 풀이를 반복하는 단조로운 일상을 만들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자식을 위하는 말과 행동이라지만 그 기준이 참 모호하다. 혹시 그렇게 행동해도 되냐고 아이에게 동의를 구했나, 아니면 아이가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고 이야기해 주던가. 그냥 부모의 욕심을 너에 대한 사랑이라고 포장하기 위한 책임 없는 그럴듯한 변명은 아니었을까 깊은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다. 어린이들이 어리고 미숙하다고 해서 어른들이 쉽게 내뱉는 말들이 때론 교묘할 때도 있다. 강한 자가 힘없는 자를 지배하듯, 내가 낳은 자식이란 이유로 나도 모르게 힘의 논리를 아이에게 적용시키지는 않았나 생각해 보았다. 말의 정당화를 위해 아이를 쏘아붙이고 몰아세우며 '사랑'이란 가면 뒤에서 부모의 권력을 행사한 것은 아닌지 깊은 반성이 필요하다. 이것이 교육, 특히 입시에 있어서 더욱 과감하게 실행되었던 것은 아닐까. 비뚤어진 사랑을 부모가 미처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어긋난 방식으로 아이들을 다그치고 아프게 하고 있다면 우선 나부터라도 더욱 각성하려 한다.
여기까지 보면 굉장히 깨어있는 괜찮은 어른처럼 떠들고 있지만 사실 나 또한 불완전한 엄마이자 사람일 뿐이다. 아이와 밖에서 잘 놀고 집에 돌아오면 '오늘도 시아는 많은 경험과 추억을 쌓았겠지.'라는 뿌듯함과 만족감이 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언제까지 이렇게 펑펑 놀아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주위의 누구 하나 그에 대한 마지노선을 그어주지는 않기에 솔직히 걱정도 된다. 이 모든 결정과 판단은 순전히 부모의 몫이기에 더욱더 판단하기 무겁고 어렵기만 하다.
'고민보다 Go'라고 했던가, 다 모르겠고 그냥 시아에게는 평생 다정하고 감사한 엄마로 기억되고 싶다. 앞으로 인생을 살아 나가며 수많은 일들로 인해 상처받고 아파할 텐데 아이의 그 작고 여린 어깨에 어미까지 한 짐 묵직하게 올려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놀다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라는 옛말럼 내 자식 때깔이라도 곱게 키우고 싶다. 어릴 때 열심히 노는 일이 결코 쓸데없는 시간 낭비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해 낼 날이 꼭 올 것이라 믿는다. 그러려면 앞으로 더 열심히 놀아야겠구나. 결론은 버킹검.
"시아야, 내일은 어디로 가볼까?"
모녀는 다음날의 '놀' 계획에 대한 수다로 오늘도 까만 밤을 분주히 수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