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구단을 못 외우면 시집을 못 가요, 아~ 미운 사람
제5화
"엄마 선생님이 나 구구단 9단까지 다 외워오래."
"어? 이번 숙제야? 수업 시간에 배우는 거 아니고?"
"아니, 나만 5단까지밖에 몰라. 100단까지 외우는 애들도 많아. 나만 빼고 오늘 선생님이 준 프린트 다 풀었어."
"다음시간까지 열심히 외워가야겠네. 그래, 알겠어."
별것 아닌 일처럼 차분히 대답했지만 아이를 등지고 돌아서며 철렁한 가슴을 붙잡았다. '이제 초1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구구단을 다 외워야 수업이 가능한 거야, 애들은 굳이 100단까지는 왜 외운 거고?' 셀프 질문을 퍼부어 봤자 알 수 없는 달나라 별나라 같은 소리에 머릿속은 자꾸만 더 복잡해져 갔다.
어찌어찌 학원에서 내주는 숙제 성실히 해가고 수업도 열심히 듣고 일일 테스트 성적이 들쑥날쑥 이어도 평균은 했으니 나름 잘 적응하며 지냈다 하겠다. 그해 여름, 학원 선생님과 1대 1 면담이 잡혔다. 초1을 데리고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나 궁금하면서도 긴장이 되었다. 선생님은 환하게 웃으시며 나에게 몇 장의 종이를 내미셨다. 월말 테스트 성적과 진도 계획서였다. 이번달 테스트는 다행히도 잘 봐서 이것에 대한 칭찬을 받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 점수가 당연하다는 뉘앙스로 간단하게 설명을 하시고는 본론으로 넘어갔다. 2학년 말에 초등 코스를 끝내면 수학 학원을 서브로 하나 더 다니면서 심화를 다지고 블라블라해서 영재학교(영재 고등학교)를 가자는 내용을 줄줄 읊으셨다.
"영재... 학교... 요?"
"네, 어머니. 이 코스대로 가셔야 원하시는 영재학교로 차근차근 가실 수 있으세요."
"아... 저는 영재학교를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굳이 이렇게 빠른 진도는 원하지 않거든요. 그냥 천천히 가는 진도는 없나요?"
"아.... 어머니, 여기 어머니들은 다 비슷한 목표로 아이들을 시키고 계시는데 어머님은 아예 관심이 없으신 거예요? 시아는 꾸준히 시키면 아주 가능성이 많은 아이인데요. 지금부터라도 잘 생각해 보시고 이 플랜대로 가시면 참 좋겠습니다. 열심히 해보아요."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현기증이 났다. 얼마 전 있었던 구구단 100단 공격에 이은 2차 충격이랄까. 나름 책육아로 아이 똘똘하게 키워 보겠다고 목이 터져라 매일 열심히 읽어주고 아이 마음에 흠집을 내면서까지 일반 유치원에서 영어유치원으로 바꿔가며 나름 되게 앞서가는 엄마라고 생각했다. 사고력 학원도 수적 개념을 즐겁게 익혀 보라고 6세 반부터 보내기 시작했고 그곳에도 뛰어난 아이라고 인정받아 어깨 뽕 좀 달고 있었는데, 뭐냐. 그동안 내가 너무 우물 안 개구리였나, 대치동이란 곳을 몰라도 너무 몰랐나. 정신적 혼쭐이 제대로 나서인지, 뜨거운 햇살 아래 멍하니 서 있었던 탓인지 갑자기 목이 탔다. 여기 엄마와 아이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공부를 시키고 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하면서 오늘 처음 들어본 영재학교 이야기에 겁도 없이 '저는 갈 생각이 없다'라고 했으렷다. 도대체 뭘 알고 이리로 이사를 오기 마음먹은 것일까. 이곳에서 우리 아이는 영재는커녕 마냥 평범한 초1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친구들과 다투지 않고 학교에서 잘 지내면 참 대단한 아이라고 부럽다며 박수갈채라도 보낼 줄 알았나 보네. 고등학교, 나아가 대학까지의 진로를 명확히 정해두고 역으로 중등, 초등, 유치원의 학습 계획을 짜야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그렇게 따져 계산해 보면 매일매일 얼마나 바쁘고 치열하게 보내야 하는지 이제야 알겠다. 끊임없이 아까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을 곱씹어 보고 나를 자책하고를 수없이 반복했다.
한동안 꽤 힘든 시간을 보내며 나름의 한 가지 결론을 얻었다. '나는 이렇게 지낼 수는 없겠다.'는 것. '이렇게'란 대치동 트랙을 따라서는 못 가겠다는 것. 반항심 아니고 튀고 싶어서 아니고 '능력이 안 되는 것' 그게 답이었다. 아이는 엄마가 꼼꼼하게 짜 놓은 스케줄을 추진력을 가지고 설득력 있게 끌고 나가면 처음에는 부정하다가도 또 적응해 그대로 잘 따르겠지. 오직 최고의 입시 성적만을 위해 무소의 뿔처럼 혼자 뚜벅뚜벅 나아갈 수 있다면 까짓 거 하나밖에 없는 귀한 자식 위해서 평생 한 번쯤 못해볼 일도 아니다. 하오나 나는 바쁘게 뛰어가는 길이 지름길이라 생각하는 부지런한 토끼 엄마가 아니고 천천히 걸어가면서 계속 아이의 표정과 기분을 살피고 싶은 지루한 거북이 엄마다. 설령 선택한 길을 가다 멀리 돌아가는 일이 생길지언정 아이와 함께 두 손 놓지 않고 발맞추어 다정하게 걸어가 보려 한다.
수학 학원은 3달의 고민 끝에 그해 11월에 그만두었다.
집에서 차근차근 공부하기로 시아와 약속을 했고 우리에게는 참 오랜만에 달콤한 시간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