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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라Lee Sep 28. 2024

추석에는 한복과 정다운 이들이 떠올라요.

지난 추석의 기억들

추석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한복과 버선, 그리고 고무신이다. 목둘레에 하얗게 둘러진 동정은 뻣뻣하고, 소매의 둥그런 배래 부분이 반찬을 집어 먹으려고 젓가락을 들어 팔을 뻗을 때마다 다른 음식들에 닿아 양념이 묻어 지저분하게 된다. 치마는 길어 치렁거리고 역시나 배래 때문에 팔꿈치가 제대로 접히지 않아 소매를 한껏 걷어올리기 일쑤였다. 발에서 붕 떠있는 느낌이 드는 앞코가 뾰족한 버선과 폭신함이라고는 없는 딱딱한 고무신도 이상했다. 설과 추석 딱 이틀만 입고 신는데도 이렇게 불편한도대 옛날 어린이들은 어떻게 하루종일 한복을 입고 놀았던 걸까 참 궁금했다.


살에 닿는 어색한 감촉이 싫어 팔을 양쪽으로 쫙 목은 거북이처럼 앞으로 삐죽 내밀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있거나 의자에 앉아서 잘 움직이지 않았다. 친가댁에 인사드리고 차례 지내기 전까지 TV를 보면서 기다리다 차례를 지내고 식사를 마칠 때까지도 한복은 벗으면 안 다. 아니, 그게 어른들에 대한 예의였다. 머리도 곱게 빗어 쫑쫑쫑 예쁘게 땋고 댕기도 묶은 조신한 소녀의 모습을 최대한 유지하고 있어야 했다. 하아, 언제까지 계속 이러고 있어야 하나 참고 참다 한계에 이르면 엄마에게 귓속말을 한다. 언제 이 옷 벗고 내 옷으로 갈아입어도 되냐고. 그럼 엄마는 외가댁도 가야 하니 벗지 말고 그대로 있으라고 주의를 주신다. 매년 나는 한복을 벗겠다고, 엄마는 참고 있으라는 말로 서로의 이견은 좁혀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외가댁에 갈 시간이 가까워지게 되면 자유의 시간이  다가올 것임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차 안에서도 이 걸리적거리는 을 입고 있어야 하고, 마찬가지로 인사드리고 어른들이 반가운 대화와 덕담을 나누실 때까지는 기다려야만 했다. 하지만 외가댁에 오면 엄마는 이전까지의 긴장 어린 표정을 풀어내시고는 이제 옷을 갈아입어도 좋다고 말씀하셨다. 한복 한  입은 것뿐인데 이상하게 놀 마음도 줄고 움직이기도 싫었으니 내가 까다로운 것인지, 까칠까칠한 한복 탓인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나니 눈이 번쩍 뜨이면서 삶의 의욕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갑자기 배도 고프고 갈비, 산적, 과일, 송편 등등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친척동생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면 이제 걔네들과 본격적으로 놀 준비 료다. 뛰고 구르고 소리 지르며 집안 곳곳을 소란스럽게 돌아다니면, 보다 못한 외할머니께서 아랫집에서 뭐라 하니 조금만 조용히 라며 우리에게 주의를 주셨다. 그러면 그때만 잠시 가만히 있는 척하다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깔깔,  꽥꽥 거리며 할머니댁이 떠나가라 신나게 놀았다. 이젠 할머니의 2차 경고가 떨어지고 제일 맏이인 나에게 미션이 던져진다. 동생들 움직이지 고 조용히 놀게 하라는 것.  4-6살 아이들 섯이 과연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만으로 9세이지만 최고 연장자인 나는 막중한 책임감에 급히 머리를 데굴데굴 굴리며 생각이라는 것을 한다. 그리고 굿아이디어는 언제나처럼 금세 튀어나왔다. 바로 술래 한 명을  정하고 나머지는 모두 나란히 눈을 감고 누운 다음, 술래가 한 명씩 발을 간질여서 웃는 사람이 새로운 술래가 되는 게임이었다. 동생들한테 물어보니 너무 재밌겠다고 난리였고 내가 시범을 보이기 위해 술래를 했다. 동생들은 발을 꼼지락 거리고 다리를 꼬고 비틀면서 입을 깨물며 웃음을 참느라 난리가 났다. 옆에 누워있는 동생들까지 킥킥대는 게 전염돼서 모두 다 같이 깔깔깔 웃었고, 할머니께서 이번엔 3차 경고를 주실까 봐 겁이 난 이 구역의 대장인 나는 계속 웃으면 더는 게임을 못한다고 동생들한테 협박을 했다. 그러면 또 다들 착해서 내 말을 조용히 잘 따랐다. 우리가 너무 조용하니 이상해서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문을 빼꼼 여셨던 외숙모가, 시커먼 데에서 아이들이 죄다 눈을 감고 쪼르륵 누워있는 걸 보시고는 모두 어디 아픈 줄 알고 깜짝 놀라셨던 건 TMI.


신나게 놀고 나니 저녁밥이 술술 잘 넘어가고 어른들이 용돈도 주시고, 있는 칭찬 없는 칭찬 끌어모아 좋은 말씀도 해주시니 이보다 행복한 날이 있을까 싶었다. 친척들이 모여 왁자지껄 웃고 떠드는 그 시간들이 이제는 아스라이 멀어져 간다. 소중한 기억들, 반가운 사람들. 사랑해서 그리웠던 사람들이 이렇게 한데 모였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꽉 었다. 어른들이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에 나도 흥이 났다. 그분들의 하나 된 기운과 에너지가 날 감싸주는 느낌에 든든했다. 이들은 모두 사랑으로 맺어진 '내 편'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게 가족의 힘위대하고 이런 끈끈함을 재확인하기 위해 명절에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그때 분명히 알게 됐던 것 같다.


그래서 나에게 추석이란, 불편한 한복과 보고 싶은 이들이 한데 얽힌 재밌고 정다운 기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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