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즐겁고 행복한 명절이 오길
“할머니 전 날 가서 자면 안 돼요?”
“엄마 아빠 두 번이나 왔다 갔다 하는 거 힘들어. 추석 날 아침 먹으러 와~”
명절이 가까워지면 아이들은 할머니들의 허락을 받기 위한 전화를 한다. 양가 부모님들이 가까운 곳에 살고 계셔서 주말을 이용해 자주 오가며 만나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너무 좋아하는 아이들이지만 하룻밤을 자려는 데는 사실 다른 이유가 있다. 엄마 아빠 눈을 피해 실컷 오락을 할 수 있는 공식적이고 유일한 날이기 때문이다. 매번 잘 받아주는 조부모님 덕에 명절만 되면 사촌들끼리 모여 밤새 오락하며 할머니가 해주시는 밥을 먹고 즐겁게 노는 반나절. 덕분에 명절에 같이 먹을 음식을 간단히 만들어두고 잠시나마 숨을 돌렸는데 이번엔 계획을 바꿔야 했다.
어깨를 수술하신 뒤 재활을 하시는 친정엄마는 음식을 만들거나 다른 집안일을 하기엔 회복이 덜 되셨고, 일하랴 아픈 아버님 챙기랴 바쁜 시어머니는 여러모로 힘드셔서 연휴 동안 쉬고 싶어 하셨다. 명절에 가족끼리 먹을 음식 조금 한다고 다 같이 모여 복작거리는 게 더 정신없고 힘들다는 시어머님 말씀에 아이들의 게임 동상이몽은 결렬되고 말았다.
달력에 빨간 날이 길어지는 명절이 다가오면 어린아이들은 마냥 즐거워하며 손꼽아 기다리지만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지며 반가워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예전과는 달라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명절은 시작 전부터 누군가에겐 노동 집약적인 날이며 스트레스의 온상이 된다. 친척들의 반갑지 않은 오지랖을 견뎌야 하는 학생이나 취준생들, 여러 번의 식사 준비와 설거지를 하느라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하는 주부들에게 명절이 반갑지 않은 건 당연하다. 중학생 이상 학생들은 추석 즈음이 되면 중간고사 날짜가 가까워져 놀고 싶지만 시험공부도 해야 하는 눈치게임을 하다 보니 명절 코앞 주말 저녁에도 도서관 열람실을 학생들로 만석이다.
어릴 적 방학이 되면 지방에 살던 사촌들과 만나기 위해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만나러 가는 길은 즐거웠다. 학교를 가지 않으면서 실컷 놀기도 하고 바빴던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들은 좋았지만 명절이라고 엄마, 아빠를 따라 내려갔던 아빠의 고향인 시골은 불편함의 연속이라 출발 전부터 걱정을 되곤 했었다. 가장 힘들고 불편했던 건 일명 푸세식 화장실. 무시무시하고 지저분한 귀신들이 잔뜩 들어앉아 튀어나올 것 같은 오싹함을 주는 곳에 들어가는 것은 고역이었다. 혹시라도 깊고 더러운 알 수 없는 그곳에 빠져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슬슬 몸에서 신호가 오기 시작하면 가기 전부터 매번 어린 마음을 덮쳐왔다. 화장실 문 앞에 서서도 문을 조심스레 여는 순간조차도 머릿속에는 온갖 상상과 상황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들어가기 전부터 공포심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명절만 되면 굳이 서울에서 퇴근하고 내려오면 시작하는 차례 음식 덕분에 쉴 새도 없이 밤이 새도록 끊임없이 일만 하는 엄마가 안쓰러웠고 커가는 만큼 엄마 옆에서 돕는 게 당연한 딸이 되었다. 힘든 엄마가 안쓰러웠던 첫째이면서 딸인 ‘K-장녀‘였기에. 엄마에게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겠지만 엄마의 고생을 조금은 내가 덜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마냥 뿌듯하지 않았다. 마당에 모여 앉아 0씨 집안에 시집온 여자들이 온종일 만들어낸 음식으로 다음날 0씨 집안 남자들끼리의 제사와 성묘가 이루어졌다. 식고 남겨진 모든 음식들이라도 제사가 끝나야 먹을 수 있었다. ‘먼저 맛을 보거나 손으로 만지면 부정 탄다’며 무섭게 막아서는 할머니들 덕분에 제사를 다 지낼 때까지 참아야 했다. 여러 번 나누어 먹어도 다 먹지도 못할 것 같은 음식들을 왜 그리도 많이 만들고 있는지. 그렇게 명절이 끝나고 먹다 먹다 다 못 먹은 전으로 만드는 ‘전 찌개’가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편식 없이 모든 음식을 골고루 잘 먹는 사람이지만 유일하게 절대 먹고 싶지도 않고 먹지 않은 음식이 바로 전으로 만든 찌개 다.
이번 긴 연휴에는 중학생이 된 큰 아이의 학원 특강과 보강으로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 못해 고민하던 차에 제부가 아이들과 다녀오라며 건넨 놀이동산 표에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렇게 연휴 하루는 신나게 놀이기구를 탔고 또 하루는 청계천부터 서울광장까지 열렸던 난생처음 보는 ‘서울거리예술축제’를 구경했다. 처음 보는 다양한 퍼포먼스를 눈앞에서 즐기면서 아이들은 색다른 경험을 즐거워했다.
명절 당일에는 부모님들과 식사를 하기 위해 새벽 일찍 준비해 찾아뵈러 가니 아무것도 안 하겠다던 약속은 온데간데없고 맛있는 음식들을 미리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올해는 진짜 우리끼리 먹을 것만 조금 했다지만 손이 큰 어머님들 솜씨가 어딜 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에서 같이 먹으려 만들어간 음식과 함께 가족들이 둘러앉아 나누어 먹으며 모두가 편하고 즐거운 명절을 즐길 수 있었다. 시어머니 친정어머니 각자의 특색에 맞는 음식들의 종류가 다르다 보니 여러 요리들을 다양하게 먹을 수 있어 좋았고 서로 만든 음식을 칭찬하느라 바빴던 이번 추석의 또 다른 따뜻함이었다.
결혼을 하고 아들만 둘 인 집이라 걱정이 되고 신경도 많이 쓰였지만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배려해 주시는 시부모님 덕에 오히려 살갑게 굴려 노력하는 며느리가 될 수 있었다. 명절 당일에 아침만 먹으면 친정에 가라고 성화를 하는 어머니를 보며 다 가버리고 허전하지 않으실까 싶어 한 끼 더 먹고 가겠다고 눌러앉아 버리기도 하고 답답하게 두 분이 집에만 계시니 근처 바람 쐬러 가시자고 일부러 핑계를 만들어 모시고 나가기도 했다.
왜 이렇게 힘들게 혼자 하시냐 불러서 좀 시키지 안쓰러워 잔소리하는 며느리에게 너희들이 와서 시키는 게 더 귀찮다고 내가 혼자 해버리는 게 편하다는 시어머니. 형님과도 서로 고생한다며 설거지 도맡아 하려 즐거운 실랑이도 벌어진다. 식사 후 어머니와 형님과 셋이서만 식탁에 둘러앉아 커피 한잔 하며 나누는 담소가 그렇게 정답고 재미있다. 당연한 평화와 안녕은 그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상대를 배려하며 나를 조금 더 내려놓는데서 온다는 걸 매번 직접 느끼고 있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 나름의 진통과정도 있었지만 결과가 아름다우니 좋은 거라 생각한다.
언젠가부터 명절이라는 전통적인 행사와 문화들이 버겁고 힘들어 피하고 싶은 날들이 되고 다른 나라의 문화인 크리스마스나 핼러윈 등에 더 열광하고 즐기는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아무래도 누구나 스트레스 없이 그 상황을 나름의 방식으로 즐기는 날이라 그렇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즐겁고 기다려지기보다 불편하면서 힘들어지는 명절인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나라의 전통문화가 조금이 사라져 버리면 어쩌나 걱정이 될 때도 있다. 당장 모든 상황들을 바꿀 수 없지만 매년 조금씩이라도 서로서로 상대를 배려하고 함께 즐길 수 있는 명절이 될 수 있도록 작은 변화라도 끊임없이 이루어지길 염원한다.
우리 모두 누구나 즐겁고 편안하게 즐기는 평안하고 안녕한 명절이 되는 날이 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