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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여유 Sep 30. 2024

나의 나른한 추석 이야기

어렸을 적 추석 키워드는 송편 만들기였다. 할머니는 추석 전에 방앗간에 가서 쌀을 빻아 오셨다. 가져온 쌀가루를 은색 큰 대야에 넣어 반죽해 두셨다. 촉촉한 면포를 두른 쌀반죽은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엌 한쪽에서는 우리 엄마를 비롯한 며느리들과 고모가 전을 부치신다. 할아버지는 밤껍질을 깎고, 아이들과 할머니는 상에 둘러앉아 송편을 빚기 시작한다. 할머니는 송편을 정말 예쁘게 빚으셨다. 세월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두툼하고 투박한 손에서 섬세하고 단정한 송편이 마술처럼 만들어지는 모습이 신기해 홀린 듯 구경했었다. 언제 처음 송편을 빚기 시작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할머니 손에서 뚝딱하고 만들어지는 송편을 따라 하고 싶어 열심이었다. 먼저 덩이리로 나누어진 큰 쌀반죽에서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도록 떼어 손바닥에서 굴린다. 동그란 모양의 반죽을 열댓 개 만들어 상 위에 조르륵 줄 세워둔다. 그중 하나를 집어 양쪽 엄지로 절구 모양이 되도록 움푹하게 만든다. 그 안에 깨와 설탕이 섞인 속을 한 스푼 듬뿍 퍼서 넣고 위쪽은 오므린다. 아래쪽은 약간 뾰족하게, 마감한 위쪽은 작은 지붕이 생기도록 빚으면 끝이다. 할머니는 내가 송편을 하나 만들 때마다 예쁘게 빚는다며 예쁜 딸을 낳겠다고 하셨다. 같은 모양 하기가 지루해져서 토끼 모양으로 만든 적도 있고, 별 모양, 하트 모양으로 만든 적도 있다. 내 멋대로 만든 송편을 친척들은 입을 모아 손재주가 있다고 칭찬해 주고, 창의적이라며 치켜세워주셨다. 신난 나는 또 다음 반죽을 집어 들었다. 돌이켜보면 명절마다 가족의 기쁨이고 가문의 자랑인 것처럼 칭찬받았던 기억이 난다. 특별히 한 것도 없는데 큰 손녀라고, 첫 조카라고 아낌없는 사랑을 듬뿍듬뿍 주셨던 것 같다.

어느새 상에 앉은 가족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그 큰 대야에 있던 쌀 반죽이 동이 난다. 모여 앉아 열심히 만든 송편을 할머니는 솔잎이 깔린 찜기에 올려 쪄내셨다. 은색 찜기에서는 곧 김이 모락모락 오르며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다 쪄지면 젓가락으로 하나 푹 찔러 호호 불고 한 입 깨물어 입을 크게 열어 또 김을 내보내 가며 먹었다. 각자의 개성이 담긴 송편이 누구 것인지 알아보는 재미도 있었다. 지금 송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때 맛있게 먹었던 이유는 내 손으로 만든 송편이라 그랬던 것 같다.

파는 송편도 몇 개 안 집어 먹는다.

부끄럽게도 결혼하기 전까지 난 전 부치는 것을 도와드린 적이 없다. 신문지를 깔고 전기 팬을 늘어놓은 부엌 바닥에는 내가 앉을자리가 없어 보였다. 도우려고 하면 어차피 나중에 할 텐데 뭘 돕냐고 숙모가 손사래를 치셨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비집고 앉아 손 하나를 보탰으면 우리 엄마가, 숙모가, 고모가 편하셨을 텐데 인제와 반성해 본다. 다들 힘들지 않게 하하 호호 이야기하며 전을 부친다고 생각했다. 결혼하고 전을 부치면서 그 시절 나의 눈치 없음을 깨달았다. 거실 바닥에 배 깔고 누워 탱자탱자 놀던 나를 누구 하나 타박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제야 기억한다. 옆에 가서 어떤 것을 집어 먹어도 되는지 묻기나 했던 철없고 미련한 어린 나는 밉상은 아니었을지 얼굴이 달아오른다. 그렇지만 옆에서 집어 먹던 장떡과 고기 산적의 맛은 기가 막혔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전이 있었다. 정식 명칭은 모르겠고 난 고기 무전이라고 불렀다. 무를 얇게 썰어 그 안에 썰어놓은 고기를 넣고 돌돌 만다. 그것들을 모아 꼬치에 끼워 부친다. 노릇노릇 익어서 달큰해진 무와 짭짤한 고기의 만남은 아주 환상적이다. 그 전의 8할은 고모와 내가 먹었다. 고모도 나도 명절에만 먹을 수 있는 고기 무전을 애타게 기다렸던 것이다. 제사 후 밥을 먹으려고 앉으면 고모와 나의 젓가락은 가장 먼저 그 전을 향했다. 그러면 서로 눈 마주치고 웃으며 성이 같아서 입맛도 같다며 호들갑을 떨곤 했다.




내 기억 속 추석은 나른한 오후다. 예쁘게 부쳐진 전들은 소쿠리에 담겨 달력 한 장을 덮고 베란다에서 늘어져 있다. 명절 설거지는 모두 남자 어른들 담당이라 점심 설거지 순번을 정하고 계신다. 그 시간에 어린 아이넷은 만화책을 빌리러 동네 책방에 간다. 다녀오니 일하느라 고단했던 며느리들은 각자 방에서 낮잠을 청한다. 거실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는 씨름을 보고 계시고 나와 동생들은 냉동실 문을 연다. 전날 삼촌이 사다 놓으신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골라 입에 문다. 창으로 쏟아진 가을 햇살에 데워진 바닥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만화를 보고 수다를 떨며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따분하지만 평화로웠던 시간. 내 아련한 기억 속 추석이다. 다 큰 내가 지내는 추석은 기억 속 추석과는 좀 달라졌다. 내 기억 속 사람들에게 의문이 생긴다. 과연 모두 나와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을까? 나른하기는 커녕 저 멀리 날아가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전을 부쳐본 적이 없으니 기름 냄새가 지겨운지도 몰랐고, 오물 쪼물 송편 만드는 재미에 방앗간에서 쌀을 빻아올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송편을 사 왔어도 된다는 것도 몰랐으니까 말이다. 엄마께 전화드려 한번 여쭤봐야겠다.

가을 햇살이 들어오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같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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