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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 Aug 01. 2016

반성문을 쓰듯이

영화 '부산행'을 보고

마치 한 장의 반성문을 쓰듯이 이 영화를 봤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수많은 질문들이 나에게 쏟아졌고, 나는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어떤 대답도 확신이 없었다.






영화 '부산행'



( 이 글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담겨있습니다.)


이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악행들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에 대한 질문이 극 초반부터 던져진다. 아무 죄 없이 산채로 땅 속에 묻히는 돼지들의 비명 소리에 치를 떨었던 그때가 떠올랐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어김없이 보게 되는 동물들의 사채가 떠올랐다. 그때마다 위험하게도 나는 운전 중에 눈을 질끈 감는다. 그것 말고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나는 그렇게 죄 없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동물들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들에게 어떤 관심을 보이고 있는가? 안타까운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나는 금세 잊고 만다. 그 문제들을.



극 초반 처음으로 석우(공유)와 수안(수안)이 위험에 처하게 됐을 때 석우는 성경(정유미)과 상화(마동석)를 눈앞에 두고 열차 문을 닫으려 시도한다. 그들을 들여보내면 그 뒤를 바짝 뒤쫓아오는 좀비들에게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만삭의 임산부다. 상화는 문을 두드린다. 그때 내가 석우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질문이 던져졌다. 나라면? 나라면......



무섭고 빠르게 휘몰아치는 영화의 속도를 따라가느라 미처 대답을 하지 못하고 떠밀리고 있는데 석우 앞에서 좀비에게 당하기 일보 직전의 수안을 상화와 성경이 구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아...... 감독이 나에게 대답해주는 것 같았다. "정답은 이거지 이 바보야."



남몰래 부끄러움을 가득 안은 나처럼 석우도 그때 뭔가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듯 보였다. 비슷한 상황이 다시 닥쳐오자 석우는 상화를 비롯한 다른 이들과 함께 우르르 전력질주로 달려오는 좀비들을 막기 위해 문을 온몸으로 막아선다. 그들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무사히 열차에 탑승한다.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이 나에게 던져진다. 좀비들을 막아서느라 아직 열차에 탑승하지 못한 상화, 석우, 영국(최우식) 등을 기다릴 것인가, 그대로 열차를 출발시킬 것인가. 이 영화에서 뚜렷한 악역 용석(김의성)은 열차 승무원에게 빨리 열차를 출발시킬 것을 강요한다. 진희(안소희)는 아직 친구들이 타지 않았다고 조금만 더 기다리자고 하지만 승무원은 기장에게 열차를 출발시켜도 된다고 무전을 보낸다. 내가 그 승무원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나는 그들을 끝까지 기다렸을까? 아니면 더 큰 피해를 입기 전에 열차를 출발시켰을까?



이 대답에 대한 질문 역시 빠르게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상화, 석우, 영국은 다행히도 열차에 올라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영국의 친구들(야구부원들)이 좀비들의 희생량이 되고 만다. 하지만 영화는 그들을 애도할 새도 없이 다음 상황을 향해 미친 듯이 질주한다.



이제 이 영화의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자 인상 깊었던 장면의 질문이 남았다. 많은 사람들을 구하고 또 구할 수 있는 건장하고 멀쩡한 남자 석우를 살리고 싶은가? 딱 봐도 초췌하고 무능력해 보이고 분명히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만 줄 것 같은  노숙자를 살리고 싶은가? 좀비의 눈을 피해 열차 좌석 왼쪽 밑과 오른쪽에 밑에 숨어 있는 두 사람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나에게 물었다. '둘 중 누굴 선택할래?' 나는 이 질문에 대해선 무의식 중에 조건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석우를 살려야 해.' 물론 관객으로서 주인공을 살리고 싶은 마음이야 당연한 거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 이전에 나는 이미 노숙자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그렇게 답을 이미 내려버린 나에게 영화는 또 한 번 다른 답을 준다. 그 노숙자가 최후에 자신을 희생하여 성경과 수안을 살리게 하면서. 석우 조차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성경과 수안을 살린 건 바로 내가 좀 전의 선택에서 버린 노숙자였다.



이 영화는 이런 식의 질문을 수없이 던지고 대답하고 던지고 대답한다. 그리고 쉽게 대답하지 못할 관객들에게 부끄러움을 안긴다. '당신도 결국 똑같지 않습니까? 당신이 욕하는 사람과 말이죠.'라고 말하면서. 그런데 난 그 부끄러움을 고스란히 받아 안고서도 끝내 확실히 대답하지 못했다. '나라면 안 그랬을 거야.'라고. 영화임을 알면서도 어마어마하게 공포스러웠던 상황들을 내가 실제로 맞딱뜨렸을 때 그 두려움 앞에서 나는 과연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나와 내 가족을 위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영화 '부산행'에 대한 글들을 보면 역시 '세월호'에 대한 얘기가 많다. 누구나 떠올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나는 그때의 '나'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나와 함께 바라보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모두 함께 가슴 아파하던, 그리고 며칠 사이에 확연히도 달라지던. 마치 하나 둘 씩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이라도 된 듯 돌변했던 사람들을.



분명 나와 함께 안타까워하고, 애도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돌아서기 시작했다. TV 뉴스, 인터넷 뉴스 등을 통해 쏟아져 나오는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들의 모습을 보면서 손가락질하고 욕을 하고 매도하기 시작했다. 영화 속 좀비들을 보니 그들이 떠올랐다. 더 많은 진실들을 알아볼 노력조차 하지 않은 채 TV, 인터넷, 신문을 통해 일방적으로 전해지는 단면 만을 접하고 다 같이 몰려들어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들을 물고 뜯고 너덜너덜하게 만들던 사람들이 이 영화 속 좀비들과 다를 것이 뭐가 있을까.



나 또한 나의 이 의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는 무관심했으니까.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됐을지도 모르니 격리시키자는 용석(김의성)의 뒤에 서서 아무 의견도 내지 않고 서 있던 그 사람들이 바로 나였으니까.



영화를 보면 볼수록 마주하고 싶지 않은 나와 마주하는 고통이 있었고, 떠올리기 힘든 기억들을 마주하는 괴로움이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마지막 수안의 노래에, 그 말도 안 되는 신파 앞에서 나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검은 구름 하늘 가리고
이별의 날은 왔도다
다시 만날 기약을 하고
서로 작별하고 떠나리
알로하 오에
알로하 오에

꽃 피는 시절에 다시 만나리

알로하 오에
알로하 오에

다시 만날 때까지



너무 미안했고, 너무 안타까웠던 그때의 감정이 고스란히 올라와 눈물이 되었다. 영화가 끝나고 사람들이 일어서서 나가는데도 내 눈물은 멈추지를 않았다. 이렇게까지 나를 울린 수안의 연기가 참 얄미웠다. 알면서도 당하게 되는 이 어쩔 수 없는 상황...... 동생도, 엄마도 내 양쪽에서 훌쩍훌쩍거리고 있었다. 아니, 영화관 전체가 훌쩍이고 있었다.



영화 '괴물'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 영화는 나에게 '괴물'을 넘어서는 작품이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영화 '괴물'을 보던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질문을 던지고 훨씬 더 깊은 반성을 하게 되는 작품이었다. 그 어디로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이 옴짝달싹 못한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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