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Inside Wisdom

좋은 영화란

월-E를 다시 보고.

by Ann

좋은 영화는 나와 함께 나이 들기도 하고, 반대로 좋은 영화는 변하지 않고 늘 그대로이기도 하다. 늘 그대로 순수하게 그 자리에 있어줘서 그때의 순수했던 '나'를 추억하게 해준다. 그리고 다시 그때로 돌아갈 계기를 만들어준다.



나에게 Wall-E(월-E)는 그런 영화다. 지금은 잊히고, 흐려져버린 순수하고 깨끗하고 맑은 마음으로 다짐했던 수많은 것들을 다시 꺼내어 보여주는 영화. '네가 그때 생각했던 것들이야. 자, 봐.'하고 말이다.





월-E의 하루 - 특별할 것 없지만 특별하게 만들어 가는



월-E의 하루는 이렇다. 눈을 뜨면 일단 비몽사몽 일어나 옥상으로 올라가 스스로를 태양열로 충전을 한다. 충전이 다 되면 맥북이 켜지는 소리가 난다(반가운 소리). 충전이 다 되면 필요한 것들을 담은 가방을 메고 유일한 지구의 생명체인 바퀴벌레 친구와 함께 일터로 향한다. 그 일터엔 함께 일 할 동료, 지켜보는 상사 하나 없다. 하지만 자신의 일인 '청소'를 주어진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성실하게 해낸다. 그 와중에 재활용할 수 있는 것들을 주섬주섬 주워 담는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주워온 것들을 제자리에 두고 비디오테이프를 틀어 좋아하는 영화를 본다. 매번 같은 영화지만. 모자를 들고 춤추는 사람들의 율동을 따라 해 보기도 하고, 좋아하는 음악이 나올 땐 녹음도 한다. 그러다 남녀 주인공이 손을 맞잡는 장면이 나오면 맞잡을 손이 없는 월-E는 자신의 두 손을 꼭 맞잡으며 외로움을 달랜다.


영화 감상이 끝나면 침대로 들어가 스스로 침대를 요람처럼 흔들거리게 한 후 잠을 청한다. 그리고 다시 아침을 맞이한다.


월-E의 이런 하루 일과를 지켜보고 있는데 그 순간 마음이 신기할 정도로 편안해지고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나도 모르게 미소도 짓고 있을 정도로.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를 기특하게도 차근차근 성실하게 차곡차곡 쌓아가는 월-E의 모습이 나의 어떤 부분을 건드린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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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E의 하루 일과는 나에게 얘기하는 것 같았다. "하루하루가 늘 특별하고, 보람 있고, 의미 있어야 하는 건 아니야."라고. 그래서 내 마음이 순식간에 편안해지고 가벼워진 것 같았다. 그 누구도 살지 않는 지구에 청소 로봇은 필요하지 않다. 당연히 청소를 할 필요도 없다. 사실 지구에서 월-E는 불필요한 존재이고, 그가 하는 일은 의미도 쓸모도 효용 가치도 전혀 없다. 그러나 월-E는 허무해하지도 스스로를 자학하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하루하루가 늘 특별하고, 보람 있고, 의미 있어야 하는 건 아니야."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대단하고 의미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묵묵하게 해나가다 보면 그것이 모여 아주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이 영화는, 월-E는 보여준다. 매일매일 하던 청소일 덕분에 식물을 발견했고, 결국 그 식물이 인류를, 지구를 구했으니까. 또 그런 삶의 일부 속에서 월-E의 사랑 '이브'를 만났으니까.


남들 눈엔 쓸모없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상 일지 몰라도 하루하루 작은 것에도 감동받고 즐거워하며 좋아하는 것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며 살다 보면 그 일상이 모여 그 어떤 것도 무너뜨릴 수 없는 튼튼한 마음의 장벽을 만들어주는 것 같다. 그런 걸 내공이라고 하는 걸까.




사랑한다면 월-E처럼



월-E는 사랑에 있어서도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이브를 사랑하는 월-E는 주저함이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물건들을 다 가져다주고, 잠금 모드가 되어버린 이브 곁을 지키고, 위험에 처한 이브를 구하고, 이브가 원하는 것이라면 주저 없이 달려든다. 현실 속에서는 바보 취급 받을 게 뻔한 캐릭터지만 이브를 향한 월-E의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은 그 누구도 쉽게 가질 수 없는 것이기에 나에게는 결코 월-E가 바보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에게도 여전히 그런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을 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월-E는 이브 때문에 위험에 처하고 때론 고통을 받는데도 그녀를 원망하거나 그녀를 향하는 발걸음을 돌리는 법이 없다. 이브를 사랑하는 마음이 월-E에게는 용기가 되고 그 용기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는다.


하루하루 순간순간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충실하고, 사랑에 있어서는 그 사랑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는 월-E의 삶은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닫게 만들어준다. 어떻게 사는 것이 진짜로 '멋지게'사는 것인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하루하루 순간순간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충실하고, 사랑에 있어서는 그 사랑에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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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멋있는 삶


대단한 일을 해내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부를 쌓는 삶이 멋있는 삶일까? 아니다. 비록 남들 눈에 의미 없어 보이는 일이라고 해도 자신에게 주어진 순간순간을 충실하게 살아내고, 작은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알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의 삶이 훨씬 더 멋진 삶이다.


바로 월-E처럼 말이다. 또 그게 가장 어려운 삶이기도 하다. 늘 깨어 있어야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고 한 순간에 만들어지는 것들이 아니니까. 오히려 그래서 나의 꿈은 오래 전부터 한 순간에 무너져내릴 수 있는 부와 명예를 쌓는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쌓여서 그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무너지지 않을 마음의 내공을 쌓는 것이다.


월-E를 다시 보면서 막 어른이 되는 것 같은 설렘이 있을 때 다짐했던 것들이 다시 떠올랐다. '어떤 어른이 될 것이다, 어떤 어른은 결코 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랑을 할 것이다' 했던. 정신 없이 살다보니 잊고 있었던 그 다짐들이 담겨져 있는 상자를 다시 꺼내 본 느낌이었다.


"그래, 내가 이랬었지. 난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 생각대로 살고 있는 걸까?"




좋은 영화


월-E를 다시 보고 나서 나에게 있어서 좋은 영화의 기준이 다시 정리가 되었다. 좋은 기억들, 좋은 생각들을 잘 간직해서 다시 꺼냈을 때 고스란히 그것들을 나에게 전달해줄 수 있는 영화. 그런 영화가 진짜 좋은 영화가 아닐까 싶다.


이 생각들도 다시 잘 담아 영화 안에 넣어두었다. 다음에 다시 꺼냈을 때 다시 나를 점검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다음에 또 만나, 월-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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