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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 Mar 17. 2017

소설 <홀>을 읽고

작은 바늘 구멍을 외면해버린 자의 최후







한때 아주 멋진 꿈을 꾸었던 친구는 나에게 하소연을 했다. '나는 지금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라고. 내 눈에 그는 내가 어릴 적 보던 우리 아빠처럼 30대 중반 남성의 모습이었다. 가정을 꾸리고 일을 하는 것 외에 자신만의 그 무엇이 없다는 그 친구의 얘기를 듣고 있으니 문득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우리가 아줌마, 아저씨라고 부르는 이들이, 그 이미지를 갖고 있는 이들이 일부러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겠구나. 그냥 주어진 삶을 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겠구나.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자신은 사라지고 아줌마가 되고 아저씨가 된 거였구나. 


연애, 결혼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나는 아직 결혼 경험은 없지만) 지금 서 있는 자리가 허전하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경우가 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 자리에 와 있던 것이다. 처음 한두 번은 귀찮아서, 두려워서 자꾸 피했던 것들이 어느 날 큰 웅덩이가 되어 나를 가두어버린 것이다. 


처음에 작은 바늘구멍 같았던 틈이 나를 몽땅 삼켜버릴 정도로 큰 구멍이 되었을 때가 돼서야 원인을 찾기 시작한다. 이미 늦은 후회와 함께 말이다. 처음엔 다른 사람을 탓하고 환경을 탓하지만 결국 그 원인이 나에게 있음을 알게 된다. 작은 바늘구멍을 발견했을 당시가 별안간 기억이 나면서 말이다. 


편혜영 작가의 소설 <홀>은 그렇게 바늘구멍에서부터 시작하다가 점점 그 구멍을 넓혀간다. 소설의 끝에 가서 우리는 엄청나게 커져버린 구멍이 주인공을 삼켜버리는 것을 목도한다. 


이 소설은 오기의 바로 눈앞의 병원 천장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때의 오기는 눈 이외에 어떤 것도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고, 기억의 대부분을 잃은 상태다. 하지만 오기는 그 병원에서 집으로 옮겨지게 되고 기억은 확장되고 움직일 수 있는 몸의 부위도 늘어간다. 독자들도 처음엔 그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났고, 사랑하는 아내와 여행을 가다가 사고가 났고 아내는 죽고 오기 혼자 살아남아 괴로워하고, 장모님이 그와 슬픔을 함께 나누며 그를 돌봐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기의 기억이 확장되면서 오기와 독자 모두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떻게 삶은 한순간에 뒤바뀔까. 완전히 무너지고 사라져서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릴까. 그럴 작정을 하고 있던 인생을 오기는 남몰래 돕고 있었던 걸까.




기억에 크게 구멍이 뚫린 오기는 자신의 몸을 이렇게 만든 사고가 자신의 인생을 망쳤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책을 끝까지 읽게 되면 그의 인생을 망친 건 단지 그 사고 하나 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이 사고를 겪지 않았을 수도 있었고, 혹여 이 사고를 피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최후에 그가 헤어 나오지 못할 큰 구멍에 빠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가 최초에 발견한 작은 구멍을 무시하지 않았더라면, 외면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오기는 기어이 왜 그렇게 일을 비효율적으로 하느냐는 핀잔을 늘어놓았다. 그 이후 아내는 어떤 원고도 오기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생이 자신을 이 자리에 데려다 놨다고 생각한다. 살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고 한탄한다. 하지만 앞뒤 꽉 막힌 구멍에 서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되돌아보면 바로 그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나를 그 자리에 데려다 놓은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생각하는 것을 귀찮아하고, 더 이상 무언가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고, 이미 아는 것을 바탕으로 생각이 굳어지는 것 같다. 굳어진 생각을 좀처럼 바꾸려 하지 않고 바꾸려 하는 사람들에 대한 적대심만 키워간다. 나이를 권력으로 생각하고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에게 그 권력을 여러 방면에서 행사한다.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는 자신의 모습에서 자신이 가장 싫어하던 직장 상사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아기를 키우고 있는 친구는 자신의 모습에서 자신이 가장 싫어했던 엄마의 보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하지만 그 친구들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고 앞으로 그렇게 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더 좋은 직장 상사의 모습으로, 더 좋은 엄마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냥 지나쳐버렸다면, 작은 구멍을 발견하는 그 순간을 외면했더라면 두 사람 모두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모습의 어른이 되어 후배들에게, 자식들에게 상처만 주는 존재가 되는 것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의식하거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점점 많은 것을 가지게 되었고,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어 노골적으로 술수를 부렸고, 그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다. 종종 이 삶이 너무 안온해서 어느 것도 바꾸고 싶지 않을 때도 있었다. 수중의 것은 하나도 잃고 싶지 않았다. 뭔가를 성취하려고만 드는 아버지를 비난했지만 자신 역시 이미 비슷한 가치로 살아가고 있었다.



편한 대로 생각하고 편한 대로 내버려 두고 편한 대로 지내다 보면, 즉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살다 보면 나도 어쩔 수 없이, 내가 평소 그렇게 비난했던 어른이 되어버리는 것을, 결코 그렇게 되지 않겠다던 모습으로 변해버리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렇게 변한 것조차 느끼지 못하면 어쩔 수 없지만 그 결과로 <홀>의 주인공 오기처럼 인생 전체가 뒤바뀌어 버리는 일을 겪게 된다면, 괴로워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땐 그렇게 지내온 시간만큼의 후회가 밀려와도 어쩔 수 없게 된다. 오기처럼 큰 구덩이 안으로 떨어져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아내를 떠올리며 뒤늦은 눈물을 흘려도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출판사를 그만두고 글 쓰는 것에 모처럼 매진했던 아내에게, 그리고 아내의 글에 대해 조금만 더 격려를 해줬더라면 어땠을까. 아내가 자신을 의심하고 불안한 미래를 보는 이유를 자기 자신에게서도 한 번 찾아보았더라면 어땠을까. 자기 자신에게 부끄러운 일을 하고 자괴감을 느끼면서 그것을 사십 대라는 나이 탓으로만 돌리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자괴를 이겨내기 위해 언젠가 아내가 읽어준 허연의 시를 종종 떠올렸다. 사십 대란 모든 죄가 잘 어울리는 나이라는 구절이 담긴 시였다. 그 구절을 생각하면 다소 마음이 놓였다. 저만 그런 게 아니라 대체로 그럴 시기라는 것에 안도했다.



매 순간 치열하게 생각하고 반성하고 다짐하면서 살 수는 없다. 그럼 인생이 너무 피곤하고 그러다 지쳐버릴 테니까. 하지만 알고 있어야 한다. 생각하지 않고, 반성하지 않고,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나를 아무 곳에나 데려다 놓는다는 것을. 나의 소중한 사람들도, 나의 소중한 삶도 내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다 놓는다는 것을. 



나는 글을 쓰면서, 책을 읽으면서 내 삶을 끌고 가려고 노력한다. 마냥 풀어져 정신 차려보면 이상한 곳에 와 있을 때도 한두 번이 아니지만  하루를 정리하며 쓰는 글이, 힘겹게 다시 잡은 책의 한 구절이 나를 생각하게 만들고 반성하게 만들고 다짐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심하고 모순적이고 멍청한 구석이 많지만 말이다. 


<홀>을 읽고 나니 두려운 마음이 더욱 커졌다. 그냥 내버려둔 자의 최후를 보니 다시금 마음을 다잡게 된다. 내 삶의 작은 구멍들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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