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Inside Wisdom

영화 <원더우먼>을 보고

갤 가돗에 너무 의지한 원더우먼

by Ann

크리스찬 베일이 연기한 배트맨 시리즈와 다크 나이트 시리즈 외에 DC코믹스의 영웅들을 다룬 영화들은 좀 실망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도 내가 이 영화를 거의 개봉과 동시에 본 것은 영화 <배트맨 vs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의 말미에 나타난 원더우먼을 굉장히 인상 깊게 봤기 때문이다.






카드캡쳐 체리, 천사 소녀 네티, 세일러문. 내가 어릴 때 보고 자랐던 여자 영웅들이다. 물론 이들은 어린 소녀들이지만 그때는 내 나이 또래였다. 나에겐 이들이 영웅이었다. 마법으로 나쁜 사람들을 혼내주고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구해주는 귀엽고 예쁜 영웅. 그때는 나에게 그 어린 소녀 영웅들이 최고였다.



하지만 하나 둘 늘어가면서 그들과는 이별을 하게 되었다. 이제 그 소녀들은 나보다 훨씬 어리다. 내 눈엔 이제 귀엽기만 한 추억의 존재들. 어느새 나는 훌쩍 커 버렸는데 그 소녀들은 나를 따라 크지 못했다. 아무리 찾아봐도 나와 함께 큰 내 또래의 여성 영웅은 없었다. 극장에서 상영하는 히어로물의 주인공은 대부분 남자였다. 배트맨, 슈퍼맨, 아이언맨, 스파이더맨 등등. 어벤저스에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단독으로 나온 적은 없다. 언제나 이 세상을 구하는 건 남자 영웅이었다. 더 면밀히 찾아보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 그대로 면밀히 찾아봐야 한다. 나는 중학생 때 이후로 여자 영웅을 보지 못하고 자랐다. 나쁜 놈들 물리치고 세상을 구하는 슈퍼 여성 영웅 말이다.




그런 나에게 원더우먼의 등장은 굉장히 흥미로웠다. <배트맨 vs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은 나에게 정말 실망스러운 영화였다. 단 하나, 원더우먼의 활약 빼고. 중요한 타이밍에 나타나 활약을 펼치는 원더우먼은 고구마 영화에 사이다 같은 존재였다. 원더우먼이, 배트맨과 슈퍼맨이 아닌 원더우먼이 그 영화를 구했고 인류를 구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녀의 존재감은 추후 영화 <원더우먼>을 충분히 기대하고 기다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막상 기다리고 기다리던 영화 <원더우먼>은 내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도 있는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전지현 주연의 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이 자꾸만 떠올랐다. 몇 천년을 바다에 살다가 육지로 나오게 된 인어와 인간 남자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인데 이 드라마에서 배우 전지현이 맡은 인어의 캐릭터와 각종 에피소드가 원더우먼과 꽤 비슷했다. 몇 천년을 살아 신비한 존재이며 초능력을 갖춘 인어는 당연히 극 중 남자 주인공보다 훨씬 강하다. 거기에 더해 어마어마한 미모까지. 하지만 인어가 인간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벌어지는 코믹한 상황들, 남자보다 힘이 더 강해서 가끔 남자 주인공을 위기에서 구해주는 상황, 미모가 뛰어나 남자들이 그녀에게 눈길을 주자 걱정하는 남자 주인공의 모습 등 꽤 많은 부분들이 원더우먼의 몇몇 에피소드와 비슷했다.



한 마디로 원더우먼의 캐릭터와 이야기가 너무 흔하고 매력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갤 가돗 자체는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는데 말이다. (물론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그녀의 발언은 유감스럽다.) 건강미 넘치는 외모에 천진해 보이는 미소, 완벽한 액션 연기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그녀가 나오는 매 장면 장면, 그 모습과 액션에 감탄했다. 하지만 원더우먼이 싸우지 않는 시간에 하는 몇몇 행동들은 결코 멋있지 않았다. 그녀가 선천적으로 갖추고 있는 외모와 초능력은 뛰어나지만 여신으로서의 온화함과 지혜는 너무 부족해 보였다. 다시 말하면 제대로 표현되지 못 했다. 앞서 말한 드라마는(푸른 전설의 바다) 말 그대로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 장르이고 그녀가 신도 아니기에 조금 가볍게 넘긴다 해도 영화 <원더우먼>에서의 여신 다이애나(갤 가돗)는 신이고 혹독한 훈련을 오랫동안 받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인간 세계에서 지나치게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부분들이 많았다. 얼굴은 예쁘지만 세상 물정 모르고 행동하기 전에 생각을 좀처럼 하지 않는 사람처럼.



그것이 단지 영화의 가벼운 유머를 위해 원더우먼의 캐릭터를 함부로 써버린 것 같아서 너무 아쉬웠다. 좀 더 상상력을 발휘했다면 좋았을 텐데. 마블 영화들의 유머와 비교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내가 마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이 바로 창의적인 혹은 재치 있는 유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더우먼>에서의 유머는 국내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도였고, 오히려 그것이 <원더우먼> 캐릭터의 매력을 닳게 하는 요인이 된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나에겐 제대로 된 첫 슈퍼 여성 영웅 영화라고 해서 너무 큰 기대를 걸었던 것 같다. 기존 수많은 남성 영웅들이 꽤 매력적으로 만들어져 왔기에 원더우먼의 캐릭터도 그렇게 만들어지길 바라고 또 한껏 기대했었는데 배우 갤 가돗에 너무 많이 의지해버리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정말 컸다.





그래도 단지 개인의 복수가 아니라 인류의 평화를 위해 싸우는 <원더우먼>이 있어서 좋다. 누구보다 이 캐릭터가 사랑받길 원한다. 그래서 더 많은 슈퍼 여성 영웅이 만들어지길 바란다. 내 조카들, 자라나고 있는 아이들에게(성별 관계없이) 그런 캐릭터를 많이, 다양하게 보여주고 싶다. 그런 아이들이 세상을 보는 시선이 조금씩 달라진다면 훗날 그들이 자라서 만들 세상은 지금과 많이 달라질 테니까.



또 한 가지 분명한 건 그래도 어쨌거나 나에겐 크리스찬 베일이 배트맨 역을 맡았던 배트맨 시리즈를 제외하고 <원더우먼>이 저스티스 리그 영웅들의 영화 중 제일 나았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그 사실은 <원더우먼>의 다음 편을 기대하게 해준다.







ㅣ영화 정보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딥 워크>를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