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검색어에 이름이 올라오기만 해도 자동으로 "또 성추행?"이란 물음표를 떠올리게 됐다. 이름만 봐도 알만한 사람들의 추태가 만천하에 고발되고 있다. 이런 일들이 이렇게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고 피해자들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혼자 고통받아 왔다는 사실은 마음이 아프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이렇게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 것은 잘 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해자들은 순식간에 자신들이 가진 명예를 내려놓게 되었다. 법의 심판도 받아야 한다. 뒤늦게나마 이렇게 되어가는 것이 다행이다. 밝혀지지 않았다면 여전히 부와 명예를 쌓아가며 당당하게 이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었겠지. 그건 너무나도 억울한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순조롭게 잘 진행될 것이라고 예상했던 미투 운동에 제동이 걸렸다. 우려했던 일이긴 했지만...... 역시나 온라인 댓글이나 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서 피해자에 대한 질타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게, 여자가 조심했어야지. 모텔엔 왜 따라 들어가."
"아니 왜 바로 그러지 말라고 말을 못 해?"
"여자가 제 몸 간수를 잘 했어야지."
정말 듣기 싫은 말들. 결국 피해자를 탓하는 사람들. 아니, 피해자도 잘못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도대체 어떤 면에서?? 피해자가 어떤 잘못을 했다는 걸까?
"그러게 여자가 조심했어야지. 모텔엔 왜 따라 들어가?"
라는 말에 덧붙여졌던 말이
"남자들은 다 동물인데 모텔에 따라 들어가면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겁도 없이 따라 들어가?"였다.
맞다. 동물 같은 남자들도 있다. 그런 남자들 때문에 성범죄가 일어난다. 그렇다면 여자들은 모든 남자들을 동물이라고 생각하고 하대하고 무시하고 불신해야 할까? 함께 일하는 동료이지만 남자는 동물이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일을 하다 보면 피치 못할 상황들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여자는 동료 남자를 믿고 잠깐 따라 들어갔다. 얼굴도 알려진 사람이고 선배이고 그가 그의 입으로 걱정 말라고 했으니까. 그를 사람으로, 동료로서 믿은
대가가 성폭행이었다. 과연 누구의 잘못인가? 누구의 잘못이라고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여자를 저런 식으로 탓하는 사람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다. 남자가 단지 동물과도 같은 속성이 있기 때문에 여자에게 피해를 입힌 거라고. 아니다. 여자보다 강한 남자의 성욕 때문에 성폭력이 행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성폭력의 본질적인 문제는 가해자가(가해 남성) 피해자를(피해 여성) 자신보다 약자라고 생각하고, 무시하고,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에 있다. 이번 사건들을 들여다보면 가해 남성은 대부분 '갑'의 입장에 놓여있다. 피해자는 '을'의 입장이다. 피해자들은 모두 아주 잘 알려진 소위 잘 나가는 배우들이 아니었으며 그들보다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는 여성들이었다. 만약 가해 남성들이 단지 욕망을 다스릴 수 없는 동물과도 같은 존재들이었다면 왜 자신의 가족에겐 그러지 않았을까? 함께 일했던 아주 유명한 여자 배우들에겐 왜 그러지 않았을까? 왜 꼭 자신보다 불리한 위치에 있는 즉 '을'의 위치에 있는 여성들에게만 욕정을 자제하지 못했을까? 그 밑에 깔려 있는 것들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아니 왜 그러지 말라고 강하게 말을 못 해?"
내가 아는 한 지인은 상사의 부적절한 발언에 대해 바로 "그렇게 말씀하시면 부장님 신고 당해요. 말조심하세요."라고 얘기했다가 승진 안 하고 싶냐는 우려의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런 반응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이렇게 강하게 얘기할 수 있으면 다행이다. 강하게 어필을 하면 불이익을 받기는 하지만 그 여성에게는 성추행을 하지는 않는다. 자신도 아니까. 골치 아파질 거라는 걸. 참 치사한 사람들.
문제는 소심한 여성들이 겪는 고통이다. 나를 포함하여. 왜 강하게 말을 못 하냐고? 이 세상엔 그렇게 강하게 한 방 날릴 수 있는 강한 여성들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나처럼 소심한 여성들도 많다. 막상 나에게 상대방이 기분 나쁜 언행을 했다고 하더라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몸이 바로 움직여지지 않는 경우가 매우 많다. 마음 같아서는 나 같은 소심한 사람도 "이러지 마세요! 혹은 시끄러워 이 변태 자식아! 혹은 당신 신고할 겁니다!"라고 말하며 시원하게 한 방 날리고 싶지만 쉽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갑자기 그렇게 강하게 얘기하기란 쉽지 않다. 앞으로 계속 봐야 할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건 정말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다. 속으로는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뛰고 당황스럽고 무섭고 불쾌하더라도 차마 어떤 대응을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직접 겪어 보지 않고는 모른다.
오늘 배우 조민기의 음란 카톡 내용이 공개되었다. 그 사건을 다룬 기사 밑에 달린 댓글은 정말 가관이었다. 같이 대화를 주고받은 여성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읽어봤을 땐 그 피해자의 기분이 어땠을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충분히 그녀의 메시지에서 불쾌함이 드러났다. 단지 아는 사람이고 술에 취했고 당장 위험한 상황은 아니기에 되도록이면 상황을 넘겨보려고 한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댓글을 쓴 사람은 전혀 피해자들의 심정에, 상황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여자가 제 몸 간수를 잘했어야지.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한국은 아프리카 초원이 아니라고. 여성은 그 초원 위의 얼룩말이 아니고, 남성은 그 초원 위의 사자가 아니라고. 얼룩말은 언제 사자에게 먹힐지 몰라 늘 경계를 하며 살아야 한다. 어쩔 수 없는 먹이사슬이다. 그런데 남성과 여성이 그런 먹이사슬로 연결되어 있나?
우리는 동물들의 사회가 아니라 인간들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차이가 있을 뿐이지 같은 인간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배려하며 살아가야 하는 인간 사회. 그런데 여성은 언제 잡아먹힐지 모르는 초원 위의 얼룩말처럼 남자가 언제 나를 덮칠지 몰라 경계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만약에 말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쳐도 인간 사회에 맹수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면 애초에 그 맹수들을 격리시켜야 하는 거 아닌가. 대형견에 목줄과 입마개를 채우듯이. 써 놓고 어이없는 상상이라 웃음이 나온다.
저런 종류의 말들은 결국 멀쩡한 남성들도 싸잡아 열등한 동물로 만든다. 모두에게 좋지 않은 생각이며 말이며 행동인 것이다.
성폭력은 따질 것 없이 명백하게 100% 가해자의 잘못이다. 그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고통에 빠지게 만든 아주 추악하고 비열하고 잔인한 죄다. 제발 성폭력의 문제에 있어서, 피해자에 대해 더 이상 무지한 얘기들을 쏟아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멀쩡한 남성들을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동물로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성폭력 가해자들은 그저 강한 자에겐 꼼짝도 못 하고 약한 자 앞에서 강한 척 군림하는 바퀴벌레 보다도 못한 추악한 악마 들일뿐이다.
피해자들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갖다 대는 이상한 사람들. 피해자들이 취했어야 할 태도에만 예민한 사람들. 그들은 하루 빨리 그 잣대를 가해자들에게 갖다 대야 한다. 그 예민함을 가해자들을 바라보는 눈에도 가져야 한다. 여자로서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 참 힘들다. 아니 무섭다. 두렵다. 언젠가 저런 얘기들을 내가 듣게 될까 봐. 아니 아예 말조차 꺼내지 못할까 봐. 제발 나의 소중한 조카들이 사는 세상은 그런 세상이 아니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