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Inside Wisdom

무엇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을 보고

by Ann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신 분만 읽어주세요.



요즘 인간이길 포기한 사람들의 기사가 쏟아지고 있다. 그들의 행태를 보고 있으면 같은 '인간'이라는 종족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저들은 다른 그 무언가가 아닐까. 가장 멀쩡해 보이는 인간의 탈을 쓴.


그들이 자신보다 약하고 여리고 불리한 입장에 처한 이들에게 저지른 짓들은 참으로 잔인하다.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피폐하게 만드는 짓들.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저지른 짓이라고 보기 어려운 짓들.


이쯤에서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가 인간이라 여길 수 있는, 부를 수 있는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누구인가. 단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모두 인간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인간답다는 것, 그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특히 이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을 보고 난 후.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은 아주 기괴하면서도 아름다운 사랑 영화다. 기괴하다고 표현한 것은 사랑 이야기이긴 하지만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잘린 손가락, 까맣게 썩어가는 손가락, 흥건한 피, 성추행, 총성, 무시와 멸시 등이 이 영화에 등장한다. 마치 고어 영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몇 번이고 눈을 감았고 귀를 막았다. 하지만 또 어느 장면에서는 넋을 놓고 화면을 바라보기도 했다. 기괴하고도 아름다운 영화......


그 기괴함 속에 포함되는 건 오히려 기괴하게 생긴 저 괴생물체가 아니다. 인간이다. 극 중 괴생명체를 괴롭히는, 엘라이자(샐리 호킨스)가 청소부로 일하는 곳의 보안담당자인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넌)는 흑인과 여성을 차별하고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휘두르며 성희롱까지 일삼는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 아무 잘못도 없는 괴생물체에게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하고 결국 그를 죽이려고까지 한다. 집에서는 한 여자의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이지만 그의 가족들을 바라보는 눈빛은 차갑게 식어있다.


처음 말끔하게 등장했던 스트릭랜드는 영화 안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처참한 몰골로 변해간다. 그가 괴물이라고 지칭했던 그 생명체보다 더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몰골로 변해간다. 손가락은 까맣게 썩어가고, 그 고통과 야망으로 인해 눈은 쾡해지고 광기가 서려있다. 그야말로 점점 괴물로 변해가는 것이다.


반면 괴생물체의 모습으로 첫 등장에서 나를 충격에 몰아넣었던 존재와 괜히 연약해 보이고 측은하게만 느껴졌던 엘라이자의 존재는 더욱 반짝거리며 환하게 빛을 밝혀갔다. 특히 욕실 안에서 괴생물체에게 안겨 있던 엘라이자의 모습은 너무나도 관능적이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누구보다 특별해 보였다. 괴생물체도 처음엔 그저 돌연변이 괴물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모습과 행동을 보였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신비스러운 모습과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해간다.


엘라이자와 동료인 젤다는 동료로서, 친구로서 신뢰와 우정을 쌓아간다. 젤다는 남편에게 쌓인 불만을 엘라이자에게 쉼 없이 털어놓고 엘라이자는 말을 못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때론 웃으면서 들어준다. 두 사람의 수다는 젤다의 목소리로만 이루어지지만 나에겐 두 사람 모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젤다의 수다는 불평불만이 대부분이지만 그 수다가 그저 사람 사는 소리처럼 들려온다. 젤다 역시 엘라이자의 수화를 모두 알아볼 수 있고 그녀의 이야기에, 그녀의 진심에 귀 기울여준다. 또 그녀와의 의리 역시 끝까지 지킨다.


어느 쪽이 더 인간답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것들, 놓지 말아야 할 것들을 지키지 못하고 완전히 놓아버린 쪽은 어느 쪽일까.


스트릭랜드는 청소부인 엘라이자와 젤다(옥타비아 스펜서)에게 '똥이나 치우는 것들'이라고 말한다. 그들에게 물어서 뭐하냐고. 하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다시 그에게 그 말을 되돌려주고 싶어 진다.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은 바로 당신이라고. 당신은 그들의 발톱의 때만큼도 인간답지 못하다고.'




엘라이자는 아주 용감하고 멋진 사랑을 했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일을 해냈다. 그녀가 사랑을 지키기 위해 보낸 그 애절하고 간절한 눈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엘라이자는 스트릭랜드가 그녀가 사랑하는 그 생명체를 곧 죽일 계획이라는 걸 알고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 옆집 사는 자일스에게 그를 구출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자일스는 그 부탁을 거절하고 엘라이자는 끝까지 그를 붙들고 사정한다. 끝까지 자일스가 거절하자 그녀는 그로 하여금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게 하고 자신이 수화로 하는 얘기를 직접 목소리로 따라 해보라고 한다. 그리곤 수화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그때 그녀의 몸짓, 눈빛은 순식간에 나를 눈물 흘리게 만들었다. 나에게도 그녀의 간절함이 전해져 왔다. 그를 죽게 내버려둘 수 없는 그녀의 간절함, 초조함, 두려움이 그 눈빛에 모두 담겨 있었다. 숨죽이고 지켜봤고 숨죽이며 울었다.


그녀가 자신의 부탁을 거절한 자일스의 뒷모습을 향해 외친 한 마디가 나에게 큰 울림을 줬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우리도 인간이 아니에요.



그녀의 사랑의 모습은 무척 용감해 보였다. 숭고해 보였다. 그 무엇도 두려운 것이 없어 보였다. 말을 할 수 없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준, 그 어떤 편견 없이 자신을 그저 하나의 존재로 인식해준 그 괴생물체를 그녀 역시도 그렇게 받아들였다. 모습이 어찌 됐든 그녀는 그 존재를 그냥 사랑했다. 둘에게 언어는 필요치 않았다. 사랑은 말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니까.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냥 알 수 있는 것이니까. 눈빛으로, 몸짓으로, 서로의 온도로.


나는 어떤 모습일까. 사랑 안에 담겼을 때 나는 어떤 모양일까. 사랑이야 말로 자신을 그대로 담아내는 거울과도 같다. 나의 밑바닥까지 모두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나의 사랑에 비친 나는 참 용기 없고, 무지했던 것 같다.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타인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었을까. 그저 나는 좋은 여자 친구가 되고 싶었을 뿐, 단지 좋은 관계를 흉내내고 있었을 뿐. 그때의 나의 사랑은 그랬다. 나를 사랑할 용기 조차 없었던 나였다.


지금의 나는, 그때와는 조금 달라졌다고 생각하는 나는 어떤 사랑을 하게 될까. 분명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 확신한다. 그러길 바란다. 조금 더 날 사랑하고, 조금 더 용기를 내고, 조금 더 솔직한 사랑을 하게 되길 바란다.


또한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곳으로 '사랑'이라는 것이 나를 데려가 줬으면 좋겠다. 엘라이자가 끝내 아가미를 얻게 되었듯이.




인간은 자신이 다른 종족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마크 롤랜즈의 <철학자와 늑대>라는 책을 읽어보면 더더욱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 수 있다. 어느 특정 부분에서는 그럴 수 있지만 모든 면에서 우월한 건 아니다.


마크 롤랜즈는 키우는 늑대와 함께 있을 때면 자신이 그보다 훨씬 약하고 어리석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했다. 절대적인 힘에서도 늑대에게 밀리고 사냥 실력은 말할 것도 없다. 또한 토끼 하나로 행복해하는 늑대보다 자신이 훨씬 불행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어떤 존재보다 우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 우월한 것뿐이다. 하지만 그런 겸손함은 찾아볼 수가 없는 인간들이 너무나도 많다. 오히려 같은 인간끼리도 그보다 더 위로 더 위로 올라가려고만 할 뿐. 그렇게 올라가 아래에 있는 인간들을 짓밟으려고만 할 뿐.


인간이 인간이길 원한다면, 인간답길 원한다면 좀 더 겸손해져야 한다. 인간으로서 존중받길 원한다면 가장 똑똑한 지능을 가진 존재로서 그에 맞게 겸손하게 지혜롭게 행동해야 한다. 다른 동식물을 비롯해 같은 인간 사회에서도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무시하고 멸시하고 손가락질하고 소외시켜서는 안 된다.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엘라이자의 말처럼 그건 '인간도 아니게' 된다.




인간이기에 사랑을 한다. 한 존재가 한 존재를 아주 짧은 순간이라고 하더라도 오롯이 완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인간이기에 우정을 쌓아간다. 친구의 슬픔에 함께 아파하고 친구와의 의리를 지키고 친구를 위해 위험도 감수한다. 인간이기에 자신보다 불편한 존재를 돕는다. 내가 가진 것으로 다른 이가 가지지 못한 부분을 채워주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은 다른 이가 채워준다.


그렇지 못한 인간이라면 그저 껍데기만 인간인 것에 불과하다. 인간의 탈을 쓴 괴물에 불과하다. 매주, 아니 매일 괴물들을 마주하는 요즘 이 영화가 나에게 잠시나마 눈과 머리와 귀와 마음을 정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은 아이들에게 따듯한 희망을 전해주는 동화처럼, 어른인 나에게 냉혹하고 기괴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의 희망을 전해주는 동화였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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