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미 감독의 <잘돼가? 무엇이든>을 읽고
그러고 보니 요즘 에세이를 많이 읽는 것 같다. 꽤 괜찮은 에세이 집이 많았다. 누구에게나 괜찮을 만한 에세이는 아니고 지극히 개인적으로 나에게 필요했던 이야기를 하는 에세이 집. 아주 잘 쓰인 에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나를 움직이게 하는 에세이. 요즘은 자기 계발서보다 에세이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자극을 받는 것 같다. 그 안의 많은 소재들이 나를 깨운다. ‘너도 할 얘기가 있잖아. 여기에 대해서. 어서 써 봐.’ 한다.
이번에 이경미 감독의 <잘 돼가? 무엇이든>을 읽었다. 이경미? 영화감독? 그렇다면 사야지. 보통 에세이는 잘 사지 않는 편인데 영화감독 이경미라는 이름을 보고 바로 결제를 했다. 그전에 그녀의 영화 <비밀은 없다> 각본집이 있었다. 그 책이 이 책을 망설임 없이 사게 만들었다. 영화 보다 훨씬 재밌었던 각본집.
그 각본집 이후 유명한 감독들이 단편 영화를 만들어 상영하는 JTBC의 한 TV 예능에서 그녀를 만났다. 남자들만 우르르 앉아 있던 그곳에 유일한 여자 감독으로 해맑게 앉아 있던 그녀. 거침없는 말, 호탕한 웃음, 4차원적인 엉뚱함 등이 그녀를 이루는 이미지들이었다. 그녀가 만든 단편은 배우 이영애가 출연했고 두 사람이 조금 더 괴짜스럽게 조금 더 망가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내는 모습들이 참 인상적이었다. 영화를 찍을 때 내내 꺄르르 거리는 것도. 그녀는 참 밝고 당당한 사람이구나 했다.
그런데 그런 이미지가 이 책을 통해 확 깨져버렸다. 유난히 크게 웃는다, 많이 웃는다 했는데. 그녀는 어두운 부분을 꽤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안정을 찾고 싶어 했고, 써지지 않는 시나리오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유달리 악몽을 많이 꾸고, 환청까지 듣곤 했다. 감정의 기복도 상당히 심한 편인 것 같았다. 중간중간 그녀 다운 당당함, 유머, 엉뚱함이 묻어 나오기는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기죽어 있었고 움츠리고 있었던 시간들이 길었던 것으로 보였다.
영화감독을 하고 싶었던 적도 없었다고 했다. 우연한 기회에 하게 된 거라고. 원래는 연극배우를 꿈꿨다고.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이 원치 않았던 사람도 할 수 있는 직업일까 싶었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어려운 직업 중 하나가 영화감독인데 그녀는 그저 지겨운 직장 생활의 작은 이벤트 삼아 영화학교에 입학 원서를 낸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다고 한다. 이런 경우는 또 뭘까. 극한직업 중 하나로 꼽히는 영화감독을 그렇게 우연한 기회에 하게 되었고 지금도 천직인 양 잘 해내고 있다고? 시나리오를 써내고, 모두가 우러러보는 박찬욱 감독의 총애를 받고, 부르면 배우 이영애도 달려오는 그런 감독이 되었다고?
시나리오가 써지지 않아 걱정하는 이야기가 절반을 이루는데 그런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으면서도 이 일을 계속하고 있는 그녀를 보면서, 꿈꿔왔던 직업이 아니었는데도 평균 이상의 결과를 내놓는 걸 보면서 천직이라는 것이 있나 싶었다. 원하는 일이 있어도, 그것을 향해 가도 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데 딱히 꿈꿔왔던 일도 아닌데 그 길로 이끌리게 된다면 그건 천직이 아닐까. 나의 경우를 떠올려본다. 나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꿈꿨던가. 맞다. 나는 꿈꿨었고, 잘 해내지는 못하고 있으나 인정받지는 못했으나 그냥저냥 나 혼자 하고 있다. 이것도 천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앞으로 더 지켜봐야겠지.
이 책을 읽고 있으면 그녀의 인생이 참 재밌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감독이 된 경로부터 결혼에 이르기까지 예측불허다. 결혼을 안 할 것 같던, 백인 남성에 대한 공포를 갖고 있던 그녀는 우연히 한국 영화를 사랑하는 외국 영화 기자를 만났고 그와 결혼을 했다. 사람을 만나는 건 늘 예측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녀의 경우는 좀 더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녀가 영화감독을 이렇게까지 잘 해내고 있는 건 그런 성격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어떤 우연적인 일들을 선입견 없이 받아들이고 일단 겪어보는 그 유연함과 순수함. 인생이 자신을 어디에 데려다 놓든 말이다.
시간 순서도 뒤죽박죽, 내용도 뒤죽박죽 낙서 같은 글이지만, 그냥 뚝딱 써 낸 것 같은 글이지만 그녀의 반전과도 같은 이야기에 매료되어 정말 재밌게 후다닥 읽어버렸다. 내가 알던 이미지와는 좀 다르지만 오히려 이 책을 통해 받은 이미지가 덧입혀져 더욱 그녀가 좋아졌다. 한편으론 나도 어서 내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런 이야기들이 그녀여서 궁금한 거였겠지 싶어 금방 풀이 죽는다.
어서 빨리 그녀의 신작을 만나 보고 싶다. 지금도 시나리오 작업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겠지. 그 끝에 어떤 작품이 탄생할지 궁금해진다.
l 책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