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킬링 디어>를 보고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다짜고짜 펄떡펄떡 뛰고 있는 징그러워 보이는 심장을 보여준다. 처음엔 그것이 뭔지도 모르고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그렇게 경고도 없이 다짜고짜 불편하게 시작된다.
그렇게 불편한 상태는 계속된다. 음악도 그렇고 마틴(베리 케오간)의 존재도 그렇다. 스티븐(콜린 파렐)의 일상에 불쑥불쑥 예고도 없이 끼어든다. 스티븐의 이유 모를 긴장감이 나를 긴장시킨다. 영화는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은 채 계속 나를 불편하고 불안하게 한다.
영화를 한 번 보았을 때는 영화에서 벌어지는 모든 불행을 만들어내는 마틴이라는 존재가 너무 싫었다. 그는 평화로웠던 스티븐 가족의 일상을 박살 내버렸다. 설명할 수 없는 힘으로 스티븐의 아들과 딸을 사지마비, 거식증 환자로 만들어버렸다. 나는 스티븐에게 이입되어 있었고, 그런 스티븐의 평범했던 삶을 완전히 엎어버린 마틴이 원망스러웠다. 그의 태도, 표정, 외모 모든 게 불편했다. 싫었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계속 곱씹는 과정에서 나의 입장이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마틴이 한 대사 하나가 불쑥 튀어 올랐기 때문이다.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 대사를 내 머릿속에서 틀고 또 틀었다. 그러자 서서히 마틴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마틴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마틴에게 이입하기 시작했다. 스티븐에게서 벗어나서.
남편이 한 잘못 때문에 왜 우리가 대가를 치러야 하지?
제가 스파게티를
아빠랑 똑같이 먹는대요.
워낙 특이해서 바로 알아보겠다고
“쟤 스파게티 먹는 것 좀 봐. 쟤 아버지랑 똑같이 먹네.
포크를 돌리다가 입에 쑤셔 넣어.”
저만 그런 식으로 먹는 줄 알았는데 아빠도 그랬대요.
알고 보니까 사람들이 다 그렇게 먹더라고요. 똑같은 방식으로.
그걸 알고서 속이 상했어요.
아주 많이.
아빠 돌아가셨단 얘길 들었을 때보다.
우리 아빠였는데.
영화 <킬링 디어> 중에서
속이 상했다는 말. 자신과 아버지만의 공유하고 있는 방법이 아니라는 걸 알고 속이 상했다는 말이 나를 건드렸다. 마틴은 아버지를 사랑했다는 말을, 아버지를 잃고 너무 힘들었다는 말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거였다. 울지도 못하고 화내지도 못하고. 마틴의 아버지는 스티븐이 수술한 환자였고, 수술 도중 사망했다. 스티븐은 수술 직전 술을 마셨다. 사망 원인이 그것과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른다.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마틴은 그것 때문에 자신의 아버지가 죽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마틴은 아버지를 잃었다. 평범했던 가정의 균형이 완전히 깨져버렸다. 아버지는 죽었는데 죽인 이는 없다고 한다. 술을 먹고 수술한 의사,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의사는 멀쩡하게 누구보다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누군가의 남편으로 아버지로. 일말의 죄책감 때문인지 자신에게 인정을 베푸는 것 같지만 전혀 진심으로 보이지 않는다. 만약 진심이라면 당신이 내 아버지 자리를 채워줘.라고 요구하지만 들어줄 리 없다. 결국 망가진 건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가족뿐.
마틴은 스티븐이 자신이 슬퍼하고 아파한 만큼, 딱 그만큼 괴로워하길 원했다. 자신의 상실감을 그대로 느끼길 바랐다. 스티븐이 가족 중 하나를 죽이지 않으면 가족 모두가 죽게 될 거라고 경고한다. 사지가 마비되고 거식증에 걸리고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결국 죽게 될 거라고, 한 명을 죽이지 않으면. 그 정도의 고통이 자신이 느낀 고통과 맞먹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마틴은 직접적으로 자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아팠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이 경고를 통해 알려준다. 나의 고통이 바로 그 정도였어, 알아?
마틴은 피해자였다. 나는 왜 정작 피해자 마틴을 보지 못했던 걸까. 마틴이 피해자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가 다짜고짜 정신없이 시작하면서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자 나는 마틴을 침입자로 보았고 이후로도 그가 슬퍼하거나 연약해 보이거나 불쌍해 보이지 않자 피해자인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내 눈엔 갑자기 사지가 마비되어 누워 있는 두 아이들과 그들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부모에게 더 눈길이 갔고 그들이 사악한 저주를 어서 풀기를 원하고 있었다.
‘피해자 다움’이라는 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 또한 여전히 피해자 다움이라는 말에 갇혀있었구나. 피해자에게 바라는 모습이 있었구나. 그래서 마틴을 제대로 보지 못했구나. 배우려, 달라지려 노력했지만 깊게 뿌리 박힌 무의식 속의 정보들이 여전히 내 눈을 가리고 있었다. 영화 <킬링 디어>가 다시 한번 나의 무의식을 뒤흔들어주었다.
결국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 왜 마틴이 패자의 모습으로 보였는지, 스티븐이 승자의 모습처럼 보였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마틴의 입장에 서고 보니 그런 결말이 납득이 됐다. 마틴의 고통이 스티븐의 고통과 결국 같지 않았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마틴은 그걸 간절히 원했지만, 스티븐은 자기 손으로 아들을 죽였지만 냉정하게도 그만큼의 고통을 느끼지는 않았던 것이다. 멍이 든 얼굴로 앉아 부러운 듯 멀쩡해 보이는 스티븐의 가족을 바라보는 마틴의 마지막 얼굴이 그들의 위치를 말해주고 있었다.
마틴의 복수는 실패했다. 하지만 마틴의 실패를 통해 나는 배웠다. 사건 뒤에 감춰진, 숨겨둔 진실을 제대로 봐야 한다는 것을.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둔갑술에 속지 않고 그 뒤에 자리한 진실을 꿰뚫어 봐야 한다는 것을. 여태껏 나는 자주 속아왔었다는 것을.
영화는 하나의 실험극처럼 나를 시험했고, 그 시험 결과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굉장한 영화였다. 곱씹을수록 달라지는 영화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다음 시험지를 풀어보고 싶다. 지금의 나는 또 어떤 사람일지 얼마나 적나라하게 드러날지 걱정이 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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