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Inside Wisdom

살아남은 아이들

영화 <살아남은 아이>를 보고

by Ann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군가의 친한 친구였던 한 아이가 죽었다. 집에 자신의 방 하나를 갖고 있던, 그 안의 책상, 책꽂이, 침대, 야구 글러브의 주인이었던 아이가 죽었다. 엄마에게, 아빠에게 소중한 아들이었던 아이가 죽었다. 모든 것은 그대로인데 그 아이만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다시 돌아올 수는 없다.


그 아이의 이름은 은찬. 물에 빠진 친구를 구하고 죽었다고 했다. 그때 살아남은 아이의 이름은 기현. 영화는 그렇게 살아남은 기현이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여준다. 죽은 아이는 돌아올 수 없으니까. 그 아이가 사라지고 없는 세상을 살아남은 아이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엄마, 아빠는 당연히 슬픔과 함께 익숙한 듯, 익숙해지지 못한 듯 흔들거리며 살아간다. 기현은 학교를 그만두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낸다. 모두 은찬이 죽기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간다. 당연하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슬픔과 죄책감이 그들에게서 보이니까. 저들의 삶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자연스럽지 않아 내 눈에 띄었던 것은 다른 아이들이었다. 기현 주변을 맴도는 아이들. 그저 기현과 친한 친구들인가 보다 생각했는데 영화 후반부에 그 아이들은 은찬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학교 폭력 가해자들이었음이 밝혀진다. 기현도 마찬가지. 은찬은 물에 빠진 친구를 구하다 죽은 것이 아니라 괴롭힘을 당하다 물에서 미처 나오지 못해 죽은 것이었다. 영화의 중반부까지 은찬이가 기현을 위해 희생한 것으로 나오지만 후반부에 기현의 입을 통해 진실이 밝혀진다. 희생한 것이 아니라 살해당한 것이라고.


은찬이는 이 세상에서 존재 자체가 사라졌다. 그의 부모는 빛을 잃은 채 시간이 이끄는 대로 그냥 살아간다. 기현은 은찬 부모가 내미는 따뜻한 배려에 결국 진실을 이야기하고 죄책감에 몸부림친다. 그런데 나머지 아이들은? 자신들 때문에 사람이 죽어 사라졌는데 그로 인해 그 부모의 인생이 무너졌는데 여전히 기현을 따라다니며 괴롭히고 은찬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준영의 주변을 맴돌며 감시하는 그 아이들은 뭘까? 도대체 뭘까.


실제 이런 일들이 꽤 많이 일어난다. 여러 명의 아이들이 한 아이를 폭행하고 그 과정에서 폭행당하던 아이가 학교 건물에서 추락사한 사건. 더욱 충격적이었던 건 가해 학생이 조사를 받으러 나올 때 피해자 학생의 패딩 점퍼를 입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기사를 보면서 나는 너무 무서웠다. 그 패딩을 빼앗아 입은 것이든 교환해서 입은 것이든 자신에 의해 죽은 학생의 패딩을 어떻게 입고 나타날 수가 있을까? 조금이라도 죄책감이 있다면 그 옷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괴롭지 않았을까?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심리가 있는 것일까. 그런 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중고생 7명이 한 명의 학생을 4시간 동안 폭행한 사건도 있었다. 그냥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피해 학생은 심한 부상을 입고 다섯 달째 학교에 나가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폭행했는지도 기사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차마 여기엔 쓰지 못하겠다. 그 정도로 끔찍하다. 고작 16세, 17세 학생들이 저지른 일이었다. 이런 아이들을 볼 때마다 무섭다. 아직 16년, 17년도 채 살지 않은 그 아이들의 인생에 무엇이 있었길래 저리도 무시무시한, 징글징글한 괴물이 되었을까. 도대체 무엇이 저 아이들을 저렇게도 무감각하게 만들었을까.


영화에서 기현은 은찬이 죽은 곳에서 자살을 시도한다. 경찰서에서 자신의 잘못을 모두 고백한다.(기현의 고백이 100% 진실하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은 부모 뒤에 숨어버린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숨긴다. 그 어느 부모도 은찬 부모의 이야기를,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 부모들은 아이들이 잘못을 시인할, 제대로 된 진실을 이야기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것이 더욱 아이들을 괴물로 만드는 것인 줄도 모르고.


최근 JTBC에서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아름다운 세상>도 비슷한 내용이다. 한 아이가 학교 옥상에서 떨어져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고 그 배경에 다른 아이들이 있다. 아직 사건의 실체가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학교 폭력이 원이었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 드라마에서도 아이들은 부모 뒤에 숨는다. 부모는 아이를 숨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부모도 등장한다. 자기 자식의 잘못이 명백하게 드러나자 흔들리긴 하지만 더 늦기 전에 그것을 밝히고 용서를 구하는 어른이 있다. 하지만 부모에 의해 숨겨진 아이는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점점 더 신경질적이고 폭력적인 사람이 되어간다.


나라면? 뭐라 확답할 수 없다. 당연히 내 아이의 잘못으로 밝혀지면 잘못을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벌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를 위해선 그 방법이 최선인 걸 알지만 실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이기에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당당하게 얘기하지는 못하겠다. 또 내가 키운 아이가 가해자 자리에 서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할 수 없다. 어떻게 키워야 그렇게 되지 않을지 모르겠다. 또 어떻게 키워야 피해자의 자리에 서게 되지 않을지도...... 둘 다 엄청나게 괴로운 일이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한 생명을 키워 바깥세상에 내놓는다는 건 이렇게도 무서운 일이다. 무거운 일이다.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거 아니야? 하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저런 일들은 어쩌다 한 번 일어나는 일이야,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가? 등등의 이야기를 하는 어른들도 있을 것이고. 하지만 실제로 어쩌다 한 번이 아니다. 2018년 학교 폭력 실태 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해보다 늘었고 그 숫자는 약 5만 명 정도다. 5만이란 숫자가 ‘어쩌다’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숫자인가? 피해 학생의 숫자가 저 정도라면 가해자는 더 많을 것이다. 그들의 부모들이 모두 아이를 가해자로 키우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이가 가해자가 되는 것, 피해자가 되는 것 모두 100% 부모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오히려 문제 해결은 쉬워질 것이다. 진짜 문제는 그 외에도 정말 다양한 원인들이 있고 알 수 없는 원인들도 있다는 것이다. 부모의 손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기에 더욱 두렵다. 끝내 스스로를 탓하게 될 것이다. 결국 내가 잘못 키운 탓일 거야. 주변에서도 그럴 것이다. 부모가 잘못 키워서 그런 것이라고.


가해자가 된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 수 클리볼드의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책을 보면 총기 난사로 많은 희생자를 낸 가해자의 엄마임에도 아들에 대한 사랑이 절절하다. 그런데 한편으론 결국 그 아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해자가 되어서도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고 괴로워하지도 않는 아이를 보게 된다면? 그걸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 사회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생후 2개월이 된 생명을 게임에 방해가 된다고 때려죽이는 일이 벌어지는 세상에서 자꾸만 왜 아이를 낳지 않느냐고 묻고 아이를 낳지 않아서 나라가 망한다는 얘기를 하는 건 이상하다. 오히려 저런 사람들은 절대 아이를 낳으면 안 되는 거였다. 아이를 낳는 건, 키우는 건 엄청난 책임감을 가져야 할 일이고 사명감을 가져야 하는 일이다. 그 아이로 인해 벌어질 모든 일들을 감당해야 하고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 끔찍한 가해자가 되어도, 가여운 피해자가 되어도. 나는 여전히 그럴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걸 이 영화를 보고 다시 한번 확인했다.


결국 은찬의 부모와 기현, 이렇게 셋은 뜻하지 않게 얼싸안았지만 기현은 결코 은찬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을 것이다. 기현도 설사 용서받는다고 할지라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 다른 아이들은, 살아남은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은찬을 죽게 만들고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던 다른 아이들은 어떤 삶을 살아갈까. 그들의 부모는 또 어떤 삶을 살아갈까. 그 뒷 이야기가 사실 더욱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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