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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 Dec 21. 2020

괴물이 되지 않는 법

넷플릭스 드라마 <스위트홈>을 보고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읽기 전에 주의해주세요 :)



출처 : 넷플릭스



주말 집콕중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스위트홈>을 다 보았다. 원작 웹툰은 다 보지는 못하고 공개되어있는 5화까지 읽어보았는데 드라마가 원작보다 훨씬 어둡고 무거운 톤이었다. 


<스위트홈>은 정체 모를 괴물들에 맞서 그린홈 아파트 주민들이 맞서 싸우는 이야기이다. 건물 바깥에는 괴물들이 있고 주민들은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건물 안에 갇혀 있다. 바깥에는 어떤 괴물이 얼마나 있는지 알지 못한다. 설정이 마치 스티븐 킹의 소설 <미스트>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극이 진행되면서 건물 안에도 괴물이 존재함을 알게 되고 자주 나타나 익숙해지는 괴물들도 생긴다. 


드라마 1, 2화를 보면서 한 번도 엉덩이를 바닥에서 떼지 않았다. 어깨는 절로 움츠러들었다. 기존 다양한 넷플릭스 외국 드라마를 많이 봤기 때문에 웬만해선 놀라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데 끔찍한 건 언제 봐도 끔찍한 거다. 마치 외계인을 연상시키는 긴 머리와 팔다리를 한 괴물의 입안에서 구렁이 같은 촉수가 튀어나와 사람의 가슴을 파고들어 피를 벌컥벌컥 빨아들이는 모습을 보고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가 있을까. 초반에 이런 자극적인 장면은 아마 사람들을 붙들어두려는 장치였을 것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이런 장면들은 확연히 줄어든다. 


우리에게 익숙한 얼굴의 주인공들이 한꺼번에 등장하지 않는 것도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한다. 주인공이 아닐 거로 생각한 인물들이 큰 활약을 펼치고, 주인공이라 생각한 인물들이 비장한 음악과 함께 예상치 못한 상황에 갑자기 등장하면서 극에 리듬감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드라마가 너무 길었던 탓일까. 중간에 늘어지기 시작했다. 나올 사람들은 거의 다 나왔고 나를 놀라게 했던 괴물들도 갑자기 잠잠해졌다. 그때부터 갇힌 사람들끼리 갈등을 일으키며 평범한 이야기가 되었다. 재난 영화를 볼 때 우리가 자주 보던 장면들이 연출되었고 억지스러운 부분도 생겼다. 자꾸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공포는 슬픔으로 뒤바뀐다. 식량이 부족한 상황임에도 슈퍼 문을 걸어 잠그고 돈을 내고 사 먹으라던, 배우자를 향해 폭언과 폭행을 일삼던 슈퍼 주인 같은 괴물보다 더 괴물 같은 사람도 있지만 그 안의 사람들은 대부분 서로를 구한다. 그렇게 희생하고 희생당하는 이들이 하나둘씩 생기면서 건물 안에 무덤도 늘어만 간다. 왜 모두가 살 수는 없는 건지 보는 내내 답답했다. 나는 살아있지만, 나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런 내가 살기 위해 희생되었을 사람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요즘 같은 상황에서 죽는 사람들을 보니 마음이 힘들었다. 드라마의 재미를 위해 필요한 요소일 수 있지만 지금은 그것이 나에게 전혀 재미가 되어주지 못했다. 특히 다른 이들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활약한 인물들이 죽을 때는 화가 났다. 왜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거야. 왜 보고만 있는 거야. 모두가 힘을 모았다면 살릴 수도 있었잖아. 사람들에게 한 생명이 사라지는 일이 점점 익숙해지는 듯했다. 이제 더는 코로나 사망자 수를 확인하지 않게 되는 요즘의 나처럼.


이 시간에도 누군가를 잃은 사람이,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 드라마에는 상실의 고통과 슬픔을 겪은 이들이 여럿이다. 부모님을 잃은 이, 형제자매를 잃은 이, 자식을 잃은 이, 배우자를 잃은 이, 꿈을 잃은 이,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이, 자기 자신을 잃은 이들. 모두 상실로 인한 죄책감까지 끌어안고 살아간다. 그들은 자신이 잃은 것을 그리워하고 욕망하다 괴물로 변하기도 한다. 어떤 괴물은 그저 흉측스럽고 어떤 괴물에겐 연민이 느껴진다.


흉측한 괴물로 변해버린 이들의 공통점은 지나친 욕망에 사로잡혔다는 것이다. 마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파우스트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사람처럼 욕망하던 것을 얻게 되지만 그 결과 괴물이 된다. 연민이 느껴지는 괴물들은 죄책감과 슬픔에 잡아먹혀버린 안쓰러운 이들이다.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는 괴물의 귀에 누군가 속삭였다. 네 잘못이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그러자 흉측하게 돋아난 가시 돋친 괴물의 날개가 사라지고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가장 짙은 어둠도 가장 흐린 빛에 사라지는 거라는 드라마 시작 부분에 나오는 내레이션은 아마도 이런 걸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어둠 속에 갇힌 사람에게 한마디 위로, 격려가 구원이 될 수도 있다는 것. 


‘그깟 말 한마디’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살면서 그 말 한 마디를 동력 삼아 많은 일을 해왔기 때문에 그 힘을 믿는다. 이 드라마의 핵심은 그런 작은 선의, 위로, 신뢰와 같은 ‘흐린 빛’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드라마가 끔찍하지만 따듯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 사람이 괴물이 되는 것은 바이러스와 관련이 없다. 옮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다. 내가 괴물이 될지 안 될지는 나에게 달려있다. 만약 내가 저들 사이에 있었다면 나는 괴물로 변했을까? 괴물이 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괴물로 변한다면 어떤 모습의 괴물이 될까.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좀처럼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명확한 한 가지는 '나'만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이 괴물이 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드라마 시작 부분의 내레이션을 떠올린다. "이것은 살아남는 것보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게 더 힘든 세상에서 기어이 살아갈 이유를 찾아내는 우리들의 이야기다." 상실의 고통에서 벗어날 틈도 없이 누군가를 끌어안고 보살피고 구해내는 이들의 이야기를 보며 그 이유를 확인했다. 오늘도 내가 기댄, 내게 기댄 사람들을 떠올리며 일단 하루를 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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