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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 Apr 26. 2016

언젠가 너로 인해

조은 시인의 '또또'를 읽고

 





나에겐 떠올리면 아픈 금세 눈물이 차오르는 이름이 하나 있다. 내가 키우던, 지금은 무지개다리를 건너간 우리 가족이었던 '샘돌이'. 떠나간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 이름을 떠올리면 복잡한 감정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나를 울린다. 아마도 내 정신이 멀쩡할 때까지 그 이름은, 그 감정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그 애를 처음 만난 날이 떠오른다. 친구 집에 놀러 갔더니 새끼 강아지 몇 마리가 옹기종기 모여있었고, 그 강아지들의 주인인 친구는 나와 함께 온 친구들에게 데려가고 싶은 사람 있냐고 물었다. 그때 무슨 용기가 났는지 나는 뭐에 홀린 듯 내가 데려가겠다고 말한 뒤 그중 한 아이를 안고 집으로 갔다. 지금 생각해봐도 이해할 수 없는 무모한 행동이었다. 사리분별 못하는 유치원생도 아니고 중학생이나 돼가지고 무작정 강아지를 안고 집으로 가다니. 아마 지금 같은 상황이 생긴다면 난 절대 그런 행동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무작정 집으로 데리고 갔는데 마침 집에 부모님이 두 분 다 계셨다. 두 분의 첫 반응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나는 다짜고짜 강아지를 마룻바닥에 내려놓고 무작정 키우고 싶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아빠께서는 이미 귀여운 몰골로 뒤뚱거리는 강아지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계셨고, 나는 엄마와 단판을 보고 있었다. 당연히 엄마께선 황당해하셨고 꽤 부정적이셨다. 나는 이 아이를 키우게 해주신다면 성적도 올리고 말도 잘 듣겠다고 초등학생 반장선거에 나간 아이처럼 씨알도 안 먹힐 공약을 마구 내걸고 있었다.



나는 마치 독립운동가라도 되는 양 혼자 고군분투를 하고 있는데 귀 한편으로 아빠의 '이리 와봐~'하고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그 소리를 듣고 그쪽을 돌아봤는데 내가 데려온 강아지가 자기를 부르는 아빠에게 아장아장 걸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아빠는 그 모습에 홀딱 반하셨고, 냉큼 키우자고 나의 의견에 힘을 보태주셨다. 엄마는 못 이기는 척 정말로 공부 열심히 하라고 말씀하시곤 생각보다 쉽게 허락하셨다. 그렇게 그 강아지는 순식간에 우리 가족이 되었다.



우리 가족이 된 것도 순식간, 우리의 곁을 떠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동물의 수명은 왜 이리도 짧은 것일까. 특히 개의 수명은 더더욱. 샘돌이도 우리 곁에 10년 머물고 떠났다. 10년이면 긴 세월 아닌가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10년만 살다가 이별하게 된다고 상상해보면 아마 내 마음에 공감할 것이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딱 하루만 더 있어줘'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지켜보며 보낸 그 10년은 생각보다 너무 빨리 지나갔다.



조은 시인의 '또또'라는 책은 읽는 내내 샘돌이를 떠올리게 했다. 특히 샘돌이와 헤어지던 그 순간이 많이 떠올랐다. 울컥울컥 울음이 목구멍으로 올라와 자꾸 침을 삼켰다. 혼자 만의 공간에서 읽었다면 아마 펑펑 울었겠지.



내가 즐겨 입던 하얀 티셔츠로 또또를 싼 뒤 빨아 뒀던 녀석의 방석 커버로 한 번 더 쌌다. 또또를 재우기 전 "정말 너무 야위었군요"하던 수의사의 말대로 또또는 정말로 종잇장처럼 가벼웠다. 고작 그 무게감에 눌려 오래 사는 녀석을 부담스럽게 느낀 적이 많았다는 사실이 어처구니없었다.



고이 잠든 샘돌이를 안고 화장터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나도 그렇게 느꼈었다. 참 가볍구나. 너무나도 가볍구나. 이렇게도 작고 가벼운 존재가 나에게 참 큰 의미였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물끄러미 내 품에 있는 샘돌이를 바라봤다. 마치 그냥 잠깐 자고 있는 것 같은 모습에 더욱 눈물이 났다. 그리고 한편으론 실감이 나질 않았다. 이 작고 가벼운 존재가 나에게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집에 돌아오니 더욱 크게 와 닿았다.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섰는데 늘 샘돌이가 있던 그 텅 빈자리가 눈에 들어오자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몰려왔고, 모든 게 그제야 또렷하게 실감이 났던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도 몇 달 동안 샘돌이의 흔적을 떨치지 못하고 집에만 들어서면 울었다. 그 아이가 앉아있던 자리를 보고 울고, 불러도 응답이 없어서 울고, 밥그릇을 보고 울고, 사진이나 동영상 보며 울고, 그냥 보고 싶어서 울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눈물이 날 것 같은 걸 꾹 참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테고.



그렇게 한동안 나와 우리 가족은 동물을 다시 키울 생각을 하지 못 했다.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아프니까. 다시 겪을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헤어질 생각에 두려우니까. 그런 우리 가족에게 또 다른 생명이 선물처럼 찾아왔다. 약 5년 전, 인연을 맺게 된 길고양이를 밖에서만 돌보다가 엄마가 운영하시는 가게로 데려오게 된 것이다. 겁이 나 차마 데려오지는 못하고 늘 밖에서 돌보던 턱시도 고양이를 이제야 겨우 받아들이게 됐다. 헤어지는 게 두렵긴 하지만 곁에 있을 때 그들이 주는 위로와 행복감은 그 두려움을 잊게 만든다.



우리에게 오게 된 고양이의 이름은 '까망이'. 그 아이의 명대로 아프지 말고 편안하게 살다가 이별했으면 좋겠다. 다만, 전보다는 마음이 좀 덜 아팠으면 좋겠다. 내가 그 이별을 조금만 덜 아프게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키우던 동물일 뿐인데 뭐 그렇게까지 유난이냐 한다. 하지만 키워보지 않으면 모른다. 남몰래 눈물 흘릴 때 나에게 뛰어올라와 눈물을 핥아주고, 내가 집에 돌아오면 늘 한 달 이상 못 본 사람처럼 반겨주고, 혼자 가만히 누워있으면 등 뒤에 온기를 보태주던 그 존재를 어떻게 그렇게 쉽게 보낼 수가 있겠는가.



오늘따라 더욱 보고 싶다. 동글동글 반들반들했던 머리를 쓰다듬고 싶다. 촉촉했던 코에 손을 갖다 대고 싶고, 고무 같았던 발바닥을 만지고 싶다. 정말정말 보고 싶다.



보고 싶은 우리 샘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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