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 시인의 '또또'를 읽고
나에겐 떠올리면 아픈 금세 눈물이 차오르는 이름이 하나 있다. 내가 키우던, 지금은 무지개다리를 건너간 우리 가족이었던 '샘돌이'. 떠나간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 이름을 떠올리면 복잡한 감정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나를 울린다. 아마도 내 정신이 멀쩡할 때까지 그 이름은, 그 감정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그 애를 처음 만난 날이 떠오른다. 친구 집에 놀러 갔더니 새끼 강아지 몇 마리가 옹기종기 모여있었고, 그 강아지들의 주인인 친구는 나와 함께 온 친구들에게 데려가고 싶은 사람 있냐고 물었다. 그때 무슨 용기가 났는지 나는 뭐에 홀린 듯 내가 데려가겠다고 말한 뒤 그중 한 아이를 안고 집으로 갔다. 지금 생각해봐도 이해할 수 없는 무모한 행동이었다. 사리분별 못하는 유치원생도 아니고 중학생이나 돼가지고 무작정 강아지를 안고 집으로 가다니. 아마 지금 같은 상황이 생긴다면 난 절대 그런 행동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무작정 집으로 데리고 갔는데 마침 집에 부모님이 두 분 다 계셨다. 두 분의 첫 반응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나는 다짜고짜 강아지를 마룻바닥에 내려놓고 무작정 키우고 싶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아빠께서는 이미 귀여운 몰골로 뒤뚱거리는 강아지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계셨고, 나는 엄마와 단판을 보고 있었다. 당연히 엄마께선 황당해하셨고 꽤 부정적이셨다. 나는 이 아이를 키우게 해주신다면 성적도 올리고 말도 잘 듣겠다고 초등학생 반장선거에 나간 아이처럼 씨알도 안 먹힐 공약을 마구 내걸고 있었다.
나는 마치 독립운동가라도 되는 양 혼자 고군분투를 하고 있는데 귀 한편으로 아빠의 '이리 와봐~'하고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그 소리를 듣고 그쪽을 돌아봤는데 내가 데려온 강아지가 자기를 부르는 아빠에게 아장아장 걸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아빠는 그 모습에 홀딱 반하셨고, 냉큼 키우자고 나의 의견에 힘을 보태주셨다. 엄마는 못 이기는 척 정말로 공부 열심히 하라고 말씀하시곤 생각보다 쉽게 허락하셨다. 그렇게 그 강아지는 순식간에 우리 가족이 되었다.
우리 가족이 된 것도 순식간, 우리의 곁을 떠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동물의 수명은 왜 이리도 짧은 것일까. 특히 개의 수명은 더더욱. 샘돌이도 우리 곁에 10년 머물고 떠났다. 10년이면 긴 세월 아닌가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10년만 살다가 이별하게 된다고 상상해보면 아마 내 마음에 공감할 것이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딱 하루만 더 있어줘'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지켜보며 보낸 그 10년은 생각보다 너무 빨리 지나갔다.
조은 시인의 '또또'라는 책은 읽는 내내 샘돌이를 떠올리게 했다. 특히 샘돌이와 헤어지던 그 순간이 많이 떠올랐다. 울컥울컥 울음이 목구멍으로 올라와 자꾸 침을 삼켰다. 혼자 만의 공간에서 읽었다면 아마 펑펑 울었겠지.
내가 즐겨 입던 하얀 티셔츠로 또또를 싼 뒤 빨아 뒀던 녀석의 방석 커버로 한 번 더 쌌다. 또또를 재우기 전 "정말 너무 야위었군요"하던 수의사의 말대로 또또는 정말로 종잇장처럼 가벼웠다. 고작 그 무게감에 눌려 오래 사는 녀석을 부담스럽게 느낀 적이 많았다는 사실이 어처구니없었다.
고이 잠든 샘돌이를 안고 화장터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나도 그렇게 느꼈었다. 참 가볍구나. 너무나도 가볍구나. 이렇게도 작고 가벼운 존재가 나에게 참 큰 의미였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물끄러미 내 품에 있는 샘돌이를 바라봤다. 마치 그냥 잠깐 자고 있는 것 같은 모습에 더욱 눈물이 났다. 그리고 한편으론 실감이 나질 않았다. 이 작고 가벼운 존재가 나에게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집에 돌아오니 더욱 크게 와 닿았다.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섰는데 늘 샘돌이가 있던 그 텅 빈자리가 눈에 들어오자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몰려왔고, 모든 게 그제야 또렷하게 실감이 났던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도 몇 달 동안 샘돌이의 흔적을 떨치지 못하고 집에만 들어서면 울었다. 그 아이가 앉아있던 자리를 보고 울고, 불러도 응답이 없어서 울고, 밥그릇을 보고 울고, 사진이나 동영상 보며 울고, 그냥 보고 싶어서 울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눈물이 날 것 같은 걸 꾹 참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테고.
그렇게 한동안 나와 우리 가족은 동물을 다시 키울 생각을 하지 못 했다.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아프니까. 다시 겪을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헤어질 생각에 두려우니까. 그런 우리 가족에게 또 다른 생명이 선물처럼 찾아왔다. 약 5년 전, 인연을 맺게 된 길고양이를 밖에서만 돌보다가 엄마가 운영하시는 가게로 데려오게 된 것이다. 겁이 나 차마 데려오지는 못하고 늘 밖에서 돌보던 턱시도 고양이를 이제야 겨우 받아들이게 됐다. 헤어지는 게 두렵긴 하지만 곁에 있을 때 그들이 주는 위로와 행복감은 그 두려움을 잊게 만든다.
우리에게 오게 된 고양이의 이름은 '까망이'. 그 아이의 명대로 아프지 말고 편안하게 살다가 이별했으면 좋겠다. 다만, 전보다는 마음이 좀 덜 아팠으면 좋겠다. 내가 그 이별을 조금만 덜 아프게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키우던 동물일 뿐인데 뭐 그렇게까지 유난이냐 한다. 하지만 키워보지 않으면 모른다. 남몰래 눈물 흘릴 때 나에게 뛰어올라와 눈물을 핥아주고, 내가 집에 돌아오면 늘 한 달 이상 못 본 사람처럼 반겨주고, 혼자 가만히 누워있으면 등 뒤에 온기를 보태주던 그 존재를 어떻게 그렇게 쉽게 보낼 수가 있겠는가.
오늘따라 더욱 보고 싶다. 동글동글 반들반들했던 머리를 쓰다듬고 싶다. 촉촉했던 코에 손을 갖다 대고 싶고, 고무 같았던 발바닥을 만지고 싶다. 정말정말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