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어두운 심리, 샤덴프로이데(1)

타인의 불행에서 느끼는 기묘한 기쁨

by 강산

얼마 전 직장에서 한 선배와 식사를 하던 도중 나눈 대화다.

“00, 혈액암 이래. 알고 있었어?”

나는 그 00이 누군지도 모른다. 더더군다나 그 사람이 혈액암이라는 말은 지금 처음 듣는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며칠 뒤, 그 선배와 또 식사를 했다.

그는 며칠 전과 같은 이야기를 꺼냈다.

“00, 혈액암 이래. 알고 있었어?”

며칠 전 했던 이야기를 왜 또 반복할까.

“안 됐네요. 골수를 이식받아야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전화도 못하겠어.”

전화? 누구한테? 그 아픈 사람에게? 왜?


며칠 후 또 그 선배와 식사를 했다.

또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큰 결심을 했어. 와이프가 엄청 반대했지만, 내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 동료가 잘못됐을 때 마음이 너무 불편할 것 같더라고.”

무슨 이야기지? 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 기다렸다.

“내가 골수를 주기로 결심했는데, 와이프가 절대 안 된다고 하더라고.”

“네? 골수를 준다고요? 그건 그렇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DNA가 맞아야 하고, 가족끼리도 일치하기 어려워요.”


수혈도 혈액형이 맞아야 하는데, 하물며 혈액을 만들어내는 뼛속 골수를 아무런 절차 없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그는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걸까, 아니면 ‘착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은 걸까.

둘 중 하나다. 무지하거나, 계산적이거나.


“근데 세상이 더러워. 00에게 전화해서 내가 골수 기증하겠다고 했더니 뭐라는 줄 알아? 내가 나이가 많아서 안 된대. 나이 때문에 골수도 못 주는 더러운 세상!”

“선배님, 담배도 피우시잖아요. 암 환자는 정말 건강한 골수로 이식을 받아야 해요. 가족이 아니면 젊은 사람에게 받는 게 보통이고, 젊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에요. 약 복용 이력이나 해외여행 이력도 문제가 되고요. DNA 일치 검사만 해도 비용이 꽤 많이 들어요.”

그 순간, 마음속에서 묘한 분노가 일었다.

지금은 환자가 힘겨운 항암 치료를 받고 있을 시기일 텐데, 굳이 전화해서 ‘내가 골수 줄게’라고 말하는 그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선의의 탈을 쓴 자기 과시. 악마적인 자기 연민.


그는 평소에도 자신의 성과가 인정받지 못한다고 불평이 많았던 사람이다. 상사들이 자신을 몰라준다고 늘 불만을 토로했다. 그런 그가 못마땅하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자네는 혈액암에 대해 참 잘 아네?”

“저는 제 동생이 백혈병에 걸려서 제 골수를 준 적이 있거든요.”

그 말을 듣자, 그의 얼굴에 잠시 스치는 미묘한 미소가 보였다. 아주 짧은 순간, 그러나 분명했다.

상대의 불행을 들었을 때 드러나는 그 본심의 표정.


독일어에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단어가 있다.

샤덴(Schaden)은 ‘피해’, 프로이데(Freude)는 ‘기쁨’을 뜻한다.

즉, 샤덴프로이데는 타인의 불행에서 느끼는 기쁨을 말한다.

이는 단순한 냉소나 악의가 아니라, 인간 심리의 어두운 단면을 드러내는 개념이다.

그 선배의 행동은 무지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그는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00이 나랑 나이도 비슷한데 혈액암이라니. 그래도 나는 건강하니 다행이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그래, 골수를 기증한다고 해야겠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위험하겠지? 그럼 아무나 선뜻 하긴 어렵겠네.

내가 주겠다고 하면, 당연히 환자는 거절하겠지. 그래도 난 ‘하려 했다’는 사실만 남겠지.

결국 나만 좋은 평판을 얻겠군. 주면 좋은 일이고, 못 줘도 본전이야.'


나는 그가 ‘내가 동생에게 골수를 준 적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지었던 그 미소를 아직도 기억한다.

그 미소는 그가 왜 그런 말을 반복하고, 왜 기증을 ‘선언’했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는 자신이 건강하고, 도울 능력이 있으며, 선한 사람이라는 우위의 위치를 세상에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보다 자신의 ‘좋은 이미지’가 더 중요했던 사람.

‘다른 사람의 목숨보다 내 손톱 밑 가시가 더 아프다’는 말이 정확히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는 마음은 인간 심리의 복잡한 구조 속에 깊이 자리한 모순된 감정이다.

우리는 종종 주변인의 작은 실패나 실수를 보며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적어도 나는 저 상황은 아니구나.’

그 순간, 잊고 있던 자존감이 잠시 회복된다.

이 감정은 순수한 악의라기보다, 비교와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겪는 심리적 생존 반응에 가깝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도록 설계된 존재다.

작은 실수 하나에도 우리는 무의식 중에 “그래도 나는 덜 실패했구나”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 비교는 때로 자존감의 일시적 보완 장치가 되기도 한다.

타인의 불행은 나의 불완전함을 잊게 하고, 사회적 위치를 재확인시켜주는 묘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불행을 볼 때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그 속에서 이상한 연대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아이러니한 공감이 샤덴프로이데의 또 다른 얼굴이다.

도로에서 사고가 난 차량 옆을 지나며 천천히 구경하는 차들을 본 적 있을 것이다.

덕분에 뒤차들은 이유도 모른 채 막히지만, 사람들은 사고 현장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일상 속 샤덴프로이데다. 관음적이지만, 어쩌면 너무나 인간적인 본능이다.


샤덴프로이데는 수동적이고 간접적인 형태로 타인의 불행에 반응하는 감정이다.

단순한 복수심이나 자기만족이 아니라, 복잡한 정서적 과정을 내포한다.

이 감정은 단순히 성취에서 오는 자부심이나 즐거움과는 다르다.

사회적 맥락 속에서 부조화된 감정의 한 형태다.

사회적 감정이 동정, 공감, 대리만족처럼 조화롭게 작용할 수도 있지만,

질투나 경멸처럼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를 때 샤덴프로이데는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 핵심은, 타인의 불행을 정당화한다는 점이다.

“그 사람은 그런 일을 당할 만했어.”

“나보다 잘나더니 결국 그럴 줄 알았지.”

이런 식의 인식이 감정적 면죄부를 제공한다.

즉, 질투의 감정이 상대의 불행을 기쁨으로 바꾸는 메커니즘이다.


특히 경쟁 관계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강해진다.

타인의 실패는 곧 나의 위안이고, 타인의 불운은 곧 나의 안도다.

상대의 불행을 목격함으로써 내가 느꼈던 패배감이 일시적으로 사라지고,

내가 처한 현실이 그나마 괜찮게 느껴지는 것이다.


회사라는 공간은 샤덴프로이데가 가장 활발히 작동하는 무대다.

업무 배치, 성과 평가, 보상 구조 같은 제도적 요소는

동료 간 비교를 끊임없이 자극한다.

성과 차이는 곧 질투의 씨앗이 되고, 그 질투는 타인의 불행을 통해

자기 가치를 확인하려는 욕망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집단 정체성이 뚜렷할수록 이 감정은 더욱 강해진다.

‘우리 팀’과 ‘저 팀’, ‘본사’와 ‘지사’, ‘정규직’과 ‘비정규직’처럼 경계가 뚜렷한 곳일수록

다른 집단의 실패에서 더 큰 기쁨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내집단 편애와 외집단의 불운은 서로를 강화하는 쌍둥이 같은 구조다.

결국 샤덴프로이데는 인간관계의 어두운 그림자이자,

비교와 경쟁으로 작동하는 사회의 불가피한 부산물이다.


이 감정을 부정하기보다, 그 안에서 우리가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를 직시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성숙한 인간관계의 출발점일 것이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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