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마음을 알아주세요
전날의 꾸중 때문인지 은율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오늘의 할 일을 해 나갔다. 일기를 쓰고, 문제집을 풀고, 마지막으로 받아쓰기 연습을 했다. 엄마의 개입은 넘치지 않게 해야 하므로 치고 빠지는 것에 집중했다. 일기를 보자 하니, 그래서라는 접속사가 매우 남발되길래 문맥의 흐름이라는 것에 대해 슬쩍 알은체를 해 줬고, 문제집 한 장은 타이머를 10분 맞춰 놓고 해서 순탄히 흘러갔다. 허나 문제는 받아쓰기에서 터졌다는데.
틀린 것 가지고는 뭐라 하지 않는다. 그 후의 행동이 미웠지. 틀린 거 띄어쓰기 확인하고 다시 쓰랬는데, 다 했다며 내민 걸 보자니 휘갈겨 쓴 글자는 똑같은 부분 잘못 쓰여 있네. 기꺼이 빵긋 웃으며 한번 더 기회를 줬지만, 이번에도 틀리게 대충 써 논 거라. 그래서 장난기 싹 거두고 엄근진 하게 말했다.
엄마한테 꾸중 들으면 기분 나쁘지? 엄마도 너랑 똑같아. 혼내고 나면 기분 안 좋아져. 집중해서 하지 않으면 실수하고, 그러다 보면 길어져서 너도 지루하고 널 보는 엄마도 지쳐. 화내고 싶지 않아서 참고 참지만 엄마도 모르게 화가 튀어나와.
대충 여기까지 말했는데 이미 그렁그렁. 그러니까 내일부터는 우리 잘해 보자, 알겠지? 마무리 멘트에 고개를 까딱이더니 제 방에 들어가 입을 베개에 묻었는지 웅얼웅얼 소리를 내며 울었다. 각자의 감정 순화 단계 돌입. 한참이 지나고 다시 나타난 은율은 내 앞에 미니어처 케이크와 쪽지를 건네면서 '편지 배달이요'하고 도망갔다.
미안해. 이렇게 말해놓고 안 한 것도.
내가 널 어떻게 미워하겠니.
여섯 시 정각. 퇴근을 한 남편이 전화해서 물었다. 오늘 저녁은 뭔가?
양배추 볶음
응?
양.배.추.볶.음
다른 건?
그거만 므그르그!
은율이는 양배추 안 먹잖아
은율이는 고기 구워 줄 거야
와아....
순간 남편도 웃고 나도 터졌다. 이유는 다르겠지만.
축구하고 돌아온 은율이가 저녁 준비하는 내 옆을 기웃거리다 돌연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나는 솔직히 일상이 너무 힘들어. 뭐가? 학교 끝나고 피아노 갔다가, 집에 오고, 숙제하고, 문제집 풀고, 독후감 쓰고, 일기 쓰고. 그러는 동안 다른 걸 못하니까 힘들게 느껴져. 근데 네가 문제집 푸는 건 일주일에 두 번이고 나머지는 다 숙제니까 어쩔 수 없잖아. 그리고 그걸 매일매일 하는 것도 아니고 일주일에 한두 번씩 번갈아 가면서 하는데? (마음의 소리)야! 너는 학원 안 다니고 엄마가 공부를 많이 시키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문제집 한두 번 풀게 하는데. 그 정도면 만고 땡이지!
- 아니. 나도 아는데, 내가 이렇게 힘들다고 말하면 엄마는 다르게 말해줬으면 좋겠다는 거지.
- 어떻게?
- 그냥 응원해. 다른 말하지 말고. 나도 해야 되는 거 아니까 하긴 하는데 그래도 하기 싫고. 그럴 때 힘들다고 말하면, 내 마음 무시하지 말고 잘할 수 있을 거라 말해줘.
은율이는 콩나물과 목살구이를 번갈아 먹으며 밥 한 공기를 다 먹고는 더 달라 말했고, 남편은 의외로 이거 맛있다면서 굴소스 넣어 만든 양배추볶음을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잠자기 전. 우리는 사이좋게 치카를 하고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그리고 엄마 아빠를 양쪽에 둔 죄로 딸은 끝없이 뽀뽀 세례를 당했다. 내가 느그들을 어떻게 미워하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