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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러 Mar 30. 2021

귀히 얻은 내 딸

알 수 없는 게 인생

서른이 넘어도

엄마 앞에서의 나는

어리고 여린 양 한 마리.

태연하고

능숙한 자세로

염려 말라며

엄마를 위로해보지만

돌아오는 건 영락없이

나를 향한 안타까움의 한숨소리뿐.

두려운 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11년 전의 오늘, 썼던 일기의 일부다.


막상 수술실에 들어갔더니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해서

난소 한쪽을 떼어내야만 했고,

그나마 남은 난소도 많은 부분 절제했다는

담당 의사의 말에

안 그래도 허옇던 엄마의 입술은

더 바짝 말랐었다


잠깐의 휴가도 허용치 않았던

지랄 맞은 회사를 다녔던 남편의 부재에,

안 그래도 울음을 참느라 곤욕이었던 나는

엄마의 어쩌냐는 소리를 듣는 게 내내 괴로워

병실에서의 대부분을 눈 감은 채 보냈다


퇴원 후 엄마 집에서

다 같이 둘러앉아 소고기를 구워 먹는데

소주 한잔 걸친 엄마가,

- 내가 죄가 많아 그런 일을 겪은 것 같다

는 말에 결국 속엣눈물이 쏟아져 나오고 말았으나

정작 시련은 그 뒤로도 한참이나

계속되었었다


만사태평 남편의 성미가

이때처럼 고마웠던 적도 없다

내내 아무렴 어떠냐는 그 제스처가 내겐

가장 큰 힘이자 위로였다


내 사전에 아기란 없나 보다,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

무수한 번뇌와 내려놓음이 되풀이되곤 했는데

진짜 인생 참 모르겠다 싶은 게

어느 날 불쑥,

아기는 나에게 왔더랬다

시험관도 어려워 실패를 거듭했던 날들에

갑자기

그것도 지극히 자연스럽게


그러나

엄마에게 오는 길이

순탄치는 않았는지,

원래의 착상 위치보다 낮게 자리했던 아이 덕에

임신 내내 하혈 때문에 노심초사하기도 했다

왈칵 피가 터졌던

그날의 심정지 같은 순간은

심한 충격이었어서

아이의 얼굴을 처음 보았던 그 감동보다

더 생생하게 기억되곤 한다


낳은 후도 문제라면 문제지만-


여하튼,

그 아이가 어느덧 커서

지금은 가방을 팽개쳐 놓고

놀이터에서 놀고 있다


미세먼지 심하다고 집에 가자는데

십 분만 십 분만, 하길래

봐줬다


햇살은 뜨겁고

시간은 흐른다


언제 또 다른 사건이 갑툭튀 할지 모르나

답이 없어 보였던 아이에 대한 절실함

나 스스로에 대한 건강의 우려,

세상만사 모든 게 지루하기만 했던

11년 전의 나에게

지금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거봐

아무것도 아니잖아.


정희진이 말했다

삶은 언제나 막다른

그러나 꺾어진 골목과 마주하는 것이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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