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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seen Universe May 13. 2020

Who you want to be?



그래서 오늘은, 네가 어떤 존재인지를 얘기해보려 해. 아니 그보다 앞서서, 나는 무엇인가?


나는 오랫동안 내가 누구인지를 궁금해했어.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내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말이야. 무튼 이 질문에 대한 아마도 스스로 찾은 첫 번째 답변은 '나는 내가 만든 것,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믿었어. 나는 내가 만들어 간다. 규정된 과거는 없으며 오로지 만들어갈 미래만 존재한다. 나는 나를 알기 위해 탐구했고, 더욱더 내면으로 깊숙이 들어가 형형히 현실로, 보이는 어떤 모습으로 나를 만들어가길 바랬지. 



내가 만든 나

그래서일까, 나는 노력을 무척 신봉했어. 나를 '만들어 내야'하니까. 이 와중에 내게 주어진 환경은 그다지 녹록지 않았지. 그래서 나는 언제나 세상을 극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겨왔어. 정말 찬찬히 돌이켜보니까,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열여섯부터 고등학교, 대학교, 첫 직장에 취직하고 퇴사하기까지의 약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내게 삶은 언제나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 같아.



학창 시절의 난 성실한 편이고, 인내심이 긴 편이고, 좀 재수 없는 말이지만 머리도 그럭저럭 똑똑한 편이었던 것 같아. 그래서 열심히 하면 나름의 결과물을 볼 수 있었어. 그런데 열심히 해서 만들어 내는 그 결과로 나를 자꾸 만들려고 하니까, 과정이 자꾸 사라져. 열심히 시를 외웠지만 시가 주는 감동은 기억하질 못해. 시기 별 역사는 달달 외우지만 시험을 보고 나면 이내 잊혀지지. 모든 것은 다 결과물로 치환돼버렸어. 그렇게 아름다운 시들, 슬프고 찬란한 역사들은 내 안에서 남김없이 사라졌지.



동시에 그런 경험들이 다들 있을 것 같은데, 열심히 하다 보면 '왜 이걸 하고 있는지를 잊게'되어버리곤 했어. 결과물로 모든 것을 환산시키려는 탓에, 결과물에 지금의 과정을 꾸역꾸역 욱여넣으려는 욕심에 나의 일상은 모두 미래를 위한 수단이 되어버리지. 그때그때마다의 즐거움을 모두 놓쳐버리니까, 노력이라는 것에 담긴 숭고한 헌신, 인내는 좀 경박해져 갔어. 뭐랄까, 경박보다는 좋은 단어를 쓰고 싶긴 한데... 그저 참고, 그저 인내하는 것이 되어버렸지. 덜 똑똑한 견뎌냄이랄까. 아니면 이유 없이 나를 갈아 넣는다고 말해야 할까. 



나도 그렇게 축제기획자가 되려고 했던 것 같아. 대학시절, 학기마다 영화제 자원활동가를 하고, 축제를 기획하고, 동아리 기장을 하고, 축제를 소개하는 웹사이트를 만들고. 서류 상으로는 나보다 완벽한 지원자가 있을까? 라는 교만한 생각을 하며 졸업 때 원서를 하나 넣었지. 정말 딱 하나! 그런데 (당연히 합격할 줄만 알았던) 난 서탈(!)을 하고 말았지. 그때 처음으로 노력이 개런티 해주지 못하는 미래를 보았어. 



노력이라는 낡은 신조

난 노력에서 만큼은 자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노력에 관한 극단적 신봉을 하고 있었어.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다 죽어야 한다고도 생각했지. 살다 보면 만나게 되잖아, 난 뭘 해야 할 줄 모르겠어(라고 하면  뭐라도 해라고 말해주고 싶었고), 노력도 안 하면서 뭐가 되고 싶다(그따위 노력으론 아무것도 될 수 없다라고 말해주고 싶었고), 뭐가 갖고 싶다(돈이 많던가 돈을 벌으라고 일침놓고 싶었고), 뭐가 하고 싶다(그냥 말하지 말고 제발 하라고 경종을 울리고 싶었다)고 말하는 사람들. 내게 게으름, 나태함, 불평불만은 하등 무익한 것. 상종을 말아야 할 사람들이었지. 하지만 나도 결국 노력의 허상을 보게 된 거야.


고통에 대한 낡은 신조는 이렇게 말한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네가 노력한 만큼 목표는 이루어질 것이다." 서양인들에 한테 너무나 익숙한 생각이다. 하지만 자연도 그렇게 말할까? 당신은 시베리아에서 남아메리카로 날아가는 새들한테서 어떤 노력의 흔적이라도 볼 수 있는가? 전체 우주의 리듬을 타면서 수없이 많은 내부 기관들을 동시에 조율하여 한 치도 어긋나지 않고 움직이는 당신 몸에 무슨 노력이 작용하는가? 씨 한 알이 나무로 자라나 열매를 맺기 위해서 따로 애를 쓰는가?
- 디팩 초프라, 우주 리듬을 타라, 이현주 옮김, 도서출판 샨티, p124


행위가 아닌, 그저 존재하는 나

노력이 무얼까, 생각해보면 내가 아는 앎을 체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적극적으로 몸 밖으로 꺼내는 거지. 머릿속의 생각을 체력을 들여서, 시간을 들여서 무형의 것을 다시 만들어가는 것. 그 과정. 그 힘. 노력은 앎-체험으로 구성돼. 그 안에 지구력과 끈기 같은 자질이 필요하지.


나는 왜 있는 그대로 존재하지 못했을까? 그저 좀 있는 대로 살고 싶어 졌어. 그래서 앎과 체험 너머에 무언가가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지. 왜냐면 열심히 해도 항상 갈급하니까. 최선을 다해도 언제나 모든 행위가 그다음을 위한 과정밖에 되지 않으니까. 난 언제나 준비만 하고, 정작 형형히 ‘살아있지’는  않았으니까. 


영혼

그 너머의 어떤 것. 내 안에 깊은 갈급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목소리. 그래서 나는 그 너머에 영혼이 있다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나는 곧, 앎과 (앎이 체화된) 몸과 그 너머의 영혼으로 존재한다,라고 생각한 거지. 언제고 몸으로 모든 일을 할 수 없게 됐을 때 몸을 떠나리라고 생각해. 이걸 과학자 중 일부는 에너지와 물질과 에테르라고 이야기하고, 종교인들은 삼위일체의 진리를 성부와 성자와 성신으로 표현해왔던 것 같고. 


완벽한 세상이 있다면, 그곳에는 앎만 있을 뿐 체험은 없다. 앎은 신성한 상태이지만 가장 위대한 기쁨은 존재 속에 있다. 존재는 오로지 체험 뒤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것을 순서대로 펼쳐놓으면 앎, 체험, 존재가 된다.

앎 – 모든 체험의 원천은 앎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체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체험 – 알고 있는 것의 육화(肉化)이다.

존재 – 자신에 관해 체험한 모든 것의 탈육화(脫肉化)이다. 소박한 있음(is-ness)

- 닐 도날드 월쉬, 신과 나눈 이야기 1, 조경숙 옮김, 아름드리미디어, p62


그러니까 결국 나는 존재, 인 게 아닐까? 알고 체험한 것을 너머 그저 존재하는 것. 그게 궁극적인 나라고 생각해. 그럼 그다음엔? 다시 노력으로 돌아가 볼게. 노력이라는 낡은 신조는 버리지만, 결국 우리는 ‘해야’ 해. 성경에도 이런 말이 나오지.

 

네가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잠24:33-34)


누워서 되는 일은 없지. 아무리 큰 뜻도 뭔가의 결과를 만들고자 할 때는 에너지를 써야 해. 매일 해를 받고, 매일 물을 먹고, 비와 바람을 견디고. 가만히 있는 것 같은 식물도 저 안에서의 섭리를 충실히 따라가야 하지. 그러니까 난 먹고 사는 존재다, 라는 간단하고 가벼운 묵상이 '존재'에 대한 답변은 아니야. 결국 우린 어떤 행동을 해야하지. 


그런데 이건 위에 얘기했던 '노력'과는 조금 결이 달라. 그저 행동을 열심히 해서 무엇이 되어간다. 와는 확실히 다르지. 힌트는 내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에 대해 생각해보는거야. 나는, 너는 없던 것에서 있게 되었지. 창조되었어. 어떠한 모습으로. 그러니 우리는 이것을 내 삶에도 적용해보자. 존재로서의 나를 깨닫고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나아간다. 내가 창조된대로 나도 나의 삶을 창조한다. 앎과, 행동으로. 


이것이 너희 영혼의 목표다. 육체 속에 머무는 동안 자신을 완전히 실현하는 것, 참된 모든 것의 화신(化身)이 되는 것, 바로 이것이 너희 영혼의 목적이다. 

또한 이것이 너희를 위한 내 계획이다. 내가 너희를 통해 실현해야 하며, 그렇게 해서 개념을 체험으로 바꾸고, 나 자신을 체험으로 알게 되는 것, 이것이 내 이상이다.

너희는 배워야 할 어떤 것도 갖지 않은 채 지금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 너희는 이미 알고 있는 걸 밝히기만 하면 된다. 그것을 밝힘으로써 너희는 그것이 제 기능을 다하게 만들고,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자신을 새롭게 창조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너희는 삶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고 그것에 목적을 부여한다. 그렇게 해서 너희는 삶을 거룩한 것으로 만든다. - 닐 도날드 월시, 신과 나눈 이야기 1, 조경숙 옮김, 아름드리미디어, p68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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