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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가 맛있다

어제다. 촬영장이었다. 수요일. 오전에 애기똥풀도서관에서 <세 자매> 3막, 4막을 읽었다. 오후 1:30분부터 #예외와관습 전체 런스루하고 세시가 넘어서 자동차를 몰았다. MBC 코믹사극 <밤에 피는 꽃> 한 장면을 위해서, 문경에도 가고 오늘은 용인 대장금파크다. 지난달에는 SBS 금토 드라마 <마이 데몬>으로 담양까지 갔었는데 요즘 골반에 문제가 있는지 운전할 때마다 오른쪽 다리가 불편해서 아예 왼발로 브레이크와 액셀 밟는 연습을 살살하였다.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힘들진 않았다.


그건 그렇고,

어머니가 건네주신 걸 차 안에서 꺼내 먹는다. 복숭아가 맛있다. 피로해소에 좋다시며 함께 넣어주신 박카스D를 쭈욱 마셨다. 촬영장에는 한 시간 일찍 도착하는 게 좋다. 벌써 오셨어요? 하는 연출부의 목소리도 다른 날보다 듣기 좋았다. 오늘은 69회 마지막 촬영이다. 앞장면이 끝나자 여기저기 환호성이 터졌다. 분장실 밖을 조금 걷는데 저녁 어스름 바람이 시원하고 가볍게 떨어지는 빗방울이 기분 나쁘지 않더니 잠시 후 하늘에 쌍무지개가 그려진다.


마지막 촬영날에 오셨네요? 하고 먼저 인사해 주는 분장사에게 고맙다. 보통의 경우, 나는 조용하다. 말할 필요가 없으니 할 말이 더 없어지고, 할 말이 없으니 그저 속으로 중얼거리는 오늘 내가 해야 할 대사를 무한반복한다. 살면서 이처럼 무한반복하는 말들이 또 뭐가 있을까? 사극에 출연하지 말고, 아예 조선시대에 살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을 오늘도 하였다. 삶을 견뎌내야 하는 일과 말을 지우고 침묵하며 지내는 일과 연신 속으로 중얼거리는 일은 매한가지일 것이니 거기서 한번 살아보는 일도 나쁘진 않겠다 싶다.

멀리 떠 있는 무지개를 보면서 문득, 아침에 읽었던 세 자매의 3, 4막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말들이 떠올랐다. 읽으면서, 남의 말을 읽는 것만으로도 현재의 내 가슴이 찢어지는 그 대사를 다시 펼쳐보았다.


<예외와 관습>으로 공식 무대에 처음 오른다고 막내배우가 떡을 쥐어주어서 아주 감사하게 속을 채울 수 있었다. 참 고맙다. 축하한다.


베르쉬닌은 이렇게 말했다.

‘길고 긴 생애동안 이 아이들이 얼마나 견뎌야 하는지’ (이주영 옮김)

‘앞으로 기나긴 세월을 고통받으며 살겠구나!(김규종 번역)’


내 장면 촬영은 생각보다 일찍 끝이 났다. 아무 말 없이 깜깜한 밤을 달려서 자정 가까이에 대학로에 돌아왔는데 어머니는 가게 안쪽 허름한 곳에 모로 누워계셨다. 아무도 안 왔었어! 하시는 목소리가 콱 잠겨있었고 난 다시 출출해졌지만 담배만 연거푸 짝짝 빨면서 무언가를 메모하다가 그만두었다.


“때론 쓸모없고 어리석은 사소한 것들이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인생에서 중요하게 되지. 전처럼 그걸 비웃고 쓸모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앞으로 그렇게 나가며 자신을 멈추게 할 힘이 없다는 걸 느끼게 되는 거야. 오! 이런 말은 그만두지. 나는 즐거워. 마치 생전 처음으로 이 전나무 단풍 자작나무를 보는 것 같고, 모든 것이 호기심을 가지고 나를 바라보며 기다리는 것 같아. 이 나무들 주위에는 정말 아름다운 삶이 꼭 있을 거야. “


4막에서, 결투에 나가기 직전에 이렇게 말하던 남작 뚜젠바흐는 결혼을 앞둔 채로 그만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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