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향할 뿐이다
덧칠하지 않은 언어로
그저 향해 갈 뿐이다
지향. 그것이 시의 덕목이며 정치성이고 예술성이다. 시는 언제나 과정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시는 어떤 방식으로도 완성되지 않는다. 그저 향해 갈 뿐이다. 시는 사랑을 향한다. 빈 테이블을 향하고, 그 위에 올려둔 빈손을 향한다. 만지지 않고 흔들지도 않고 그대로. 시가 아름답다면 이 때문일 것이다. 시는 어떤 결과나 완성을 목적으로 두고 꾸며대는 쓰기가 아니다. 시는 어떤 것이 될 수 없다. 되기 위해 노력하더라도, 심지어 거기에 닿게 되더라도 그 순간, 시는 그 자리에서 미끄러져 다른 것을 지향하는 화살표가 되어버리곤 한다. 이처럼 시는 언제나 결핍되어 있다. 그리고 그 부족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아니, 부끄러움마저 없다.
- 유희경, 이병률의 시집 <눈사람 여관> 발문 중에서
나는 결국 이 글에 닿았다. 행선지를 없애고도 우린 길을 떠날 수 있었고, 그 길 위에서 또 다른 길을 꿈꾸기도 하였듯이, 결국 이 문장은 나를 향해 갑자기 제 몸의 한 페이지를 열었다. 무작정 나를 받아들였다. 아니 내가 이 문장에 달려들어 물고 빨고 씹고 삼켜서 내 몸의 안쪽 한 켠에 감추었다. 감추면서 자랑처럼 이렇게 부추긴다.
시를 읽던 나는 불쑥 어제의 연극이 떠올랐다. 매우 인상적이었던 연극과 오늘의 시에 대하여 몇 줄 끄적이다가 까딱 잘못하면 우물쭈물 또 날려먹을까 봐 오늘 아침에만 열두 번 열어보았다. 그리고 다시 꼭 닫았다. 그 서랍은 곧바로 내 심장이며 조각조각 부러뜨린 걸 그대로 넣어둔 <말들의 서랍>은 곧 내 몸일 것이다. 관절이 몽땅 꺾어진 조용한 말들로만 온통 이루어진 사람이 버젓이 어떤 한 길을 떠나는 여기는 다시 아침이다. 내 마음은 당신에게 향하며,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
이탈리아의 천재 작가 루이지 피란델로의 역작!
역시 아르케스럽다! 아르케다웁다! 이것은 단연코 아르케다, 하면서 공연을 보는 내내 자주 눈으로 허공 메모를 하였다. 어제의 기록들은 아직은 다 꺼내어 읽기 어렵지만 확실한 것은, 위의 문장에서 그 모든 ‘시’를, 단 하나의, 생의 위로가 되는 단 하나의 단어 ‘연극’으로 교체하여도 전혀 손색이 없다는 사실을 나는 오열하듯 물씬, 자백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 연극이 나를 그렇게 밀어붙인다.
[창작공동체 아르케] 김승철 연출의 무대 언어가 시를 읽고 있는 내 심장에 저절로 배어 나왔다. 진하다. 커피 향처럼 매혹적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우리는 창작공동체 아르케의 <작품 연대기>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르케의 어원을 더듬거리는 일은 이미 습관 중에 으뜸이며, 새들도 어떤 물 위에서 갑작스레 비행을 멈추고 부끄러운 듯이 발아래를 쳐다보다가 가끔 그 투명함에 머릴 곤두박질을 거듭하듯이 나는 정확하게 잘 알지 못해서 부끄러울 때마다 일단 국어사전을 펼치고 성긴 침묵 속 거기에 내 시선을 처박는다. 아르케는 나로 하여금 낮은 비행을 멈추게 하고 무거운 고개를 숙이고 국어사전을 펼치게 만드는 몇 안 되는 창작공동체다.
시집의 말미를 읽다가 갑자기 나는 왜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을 떠올렸을까. 그들 6인의 가족들은, 연극의 주인공이 되고자(?) 실제 인물 즉, 배우와 연출 앞으로 무턱대고 나타나서 무작정 들이댔다. 그들은 아주 오래전 이탈리아의 한 여름 땡볕아래에서, 세상의 그 모든 것이 사실은 가짜 아닌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혼돈 속에서 과연 진실이란 무엇인가?라는 어떤 궁금증의 진공상태를 증명하기 위해, 무려 1921년부터 작가를 찾아 나섰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김장인지 감자인지,라고 오타가 나서 개미눈곱만큼 웃었다)
오늘도 아르케의 등장인물들은 용케 작가를 찾을 수 있을지 몹시 궁금하다.
아르케, 내 마음을 찌르는 몇 안 되는 단어 중에 상위권, 연극을 한답시고 내내 삶을 살아낸답시고 아직도 웅크리고 앉아있는 내게는 여전히 꼭 그렇다.
#창작공동체
#아르케
#작가를찾는6인의등장인물
#절대배우 아직 유효하다면,
#강력하게 추천하는 아르케 작품이다
2020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