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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쓰는 연습, 기억 연습


어린 시절의 나를 차츰 복기하는 시간


나는 수학을 잘 못하던 아이. 수학시간에도 국어책만 읽고 싶어 하는, 늘 창밖을 내다보기 좋아하던 친구가 별로 없던 아이. 공책의 여백에다가 자꾸 엉뚱한 낙서를 끄적이던, 나는 수학 참 못하던 아이.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 한찬조 선생님은 수학을 가르치셨는데, 학기 초에 말씀하셨지.


너는 왜, 답안지를 그냥 비워두니? (하늘에는 흰구름이 많아요) 너는 왜 무겁게 고개 숙이고 있니? (창밖에는 우리 집 하고 다른 세상이 흘러가요)


나는 교무실로 불려 가서 앉아있었지. 고개 푹 숙이고. 수학책 펼쳐놓고서. 창문만 하게 넓어진 답안지처럼 조용하게. 오래오래.


선생님의 말소리는 비행기처럼 지나갔는데, 그 비행기는 어떤 삶의 비밀을 내 머리 위에 뚝뚝 떨어뜨렸네. 너는 왜 찍지도 못하니? 쭈르륵 하나만 찍어도 중간쯤은 가지 않겠니?


아무 번호나 하나만 붙들고 쭈르륵 찍지도 못하는 나는 참 이상한 아이. 모르는 문제 앞에서는 하얗게 빈 칸처럼 혼자 남겨진 아이. 충분하게 준비 못한 발자국은 감추기만 하던 아이. 필요할 때 한 발 힘차게 내딛지도 못하는 미래의 어떤 나를 미리 닮은 아이.


나는 아직도 살면서 자주 망설이는 사람. 어린 시절의 나를 다시 살아가는 사람. 버티며 살아가는 일에 눈물 겨울 때마다, 사는 일도 이렇게 천천히 어쩌면, 정답 비슷하게라도 나와주었으면 좋겠네 하고 속으로만 말하는 사람.




세월이 흘러서 나는 우리 집 아이와 수학공부하는 시간을 제일 좋아하네. 수학시간은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시간. 어린 시절의 나를 차츰 복기하는 연습.


나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였네. 즐거운 사색놀이가 되기를 나는 소망해. 하루에 쉬운 문제 세 개씩만 풀다 보면 그까짓 수학은 아무것도 아니야. 아빠도 꼭 그랬었거든.


한찬조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을 간직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수학 전공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학공부 때문에 힘들어하는 아이 앞에게 웃을 수 있으니까요. 선생님께서 마침 잘 혼내주셔서 그럴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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