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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핀수 Mar 30. 2024

영시리즈

01

영은 바짝 마른빨래를 걷어 방 안으로 들어섰다. 햇빛이 창문을 관통해 마치 하늘에서 곧 신이라도 내려올 것처럼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영은 이것을 부러 피해 볕이 들지 않는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걷어온 것들을 대충 개어 놓고 캐리어를 열었다. 크지 않은 기내용 사이즈였지만 영에게는 그것마저 버거워 보였다. 영은 옷가지들을 넣다 구석에서 한 번도 꺼내 입지 않았던 밝은 색 원피스를 발견했다. 그리곤 그것을 꺼내 들고 냄새를 맡았다. 예전 집에서 나던 냄새. 오래된, 세탁한 뒤 한 번도 입지 않고 옷장에 처박아둔, 섬유유연제와 나무옷장 냄새가 섞인, 방치된 그것. 영은 냄새를 볼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가만히 옷에 얼굴을 파묻었다. 

냄새는 기억력이 강하다. 그 수많은 시간을 걸어오는 동안에도 제 것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하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영은 물었으나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02

조그만 흰 종이와 열여섯 가지-아니 중복을 제하면 열다섯 가지의-색연필, 고작 이 정도에도 영은 어떤 것을 채워 넣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데 하물며 인생은! 그 하염없이 큰, 무얼 그려야 할지 몰라 한참을 비워 놓은 자신의 캔버스는! 영은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짚었다. 도무지 아무것도 떠오르질 않았다. 그려야 할 것도, 그리고 싶은 것도 없었다. 

 

실은, 많았지만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몇 번이고 수정을 거듭해야 한다는 것을 영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두려웠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잘 그려낼 수 있단 보장도 그만한 열정도 없었다. 때문에 그냥, 아무것도 없는 사람인 양. 텅 빈 사람이 되어버리기로 한 것이다.

 


03

영의 새방은 먼지로 꽤 골치가 아팠다. 

영은 바닥에 깔린 카펫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구태여 그것을 걷어 낼 생각은 없었다. 그리하여 영의 검은 창틀에는 늘 먼지가 수북하게 앉아 있었는데 영은 그것이 꼭 추억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닦아내도 종내는 다시 쌓여버리고 마는,

닦지 않고 내버려 둔다 한들 절대 겹겹이 쌓이지는 못하는

그런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한

후 하고 불면 저 멀리 공기 중으로 흩어져버릴

그런 추억.


04

그날 영은 자신의 방 한가운데에 쪼그리고 앉아 눈물을 닦아냈다.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으므로.


삶이 막다른 곳에 도착했다고 느껴질 때, 그런 때는 드라마틱한 비극적인 일을 겪어야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그저 그런 내 일상이 너무도 그저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고 더 고꾸라질 일만 남았다고 생각될 때에, 그럴 때 불현듯 찾아오는 것이다. 그렇게 다들 자신의 종말을 생각하게 된다. 갈 곳이 없었으므로,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05

하물며 깨져버린 유리병의 파편도 치우려면 며칠이 걸리는데 사람 마음을 모조리 부수어 놓고 그 마음이 쉽게 붙어 다시 반짝거리길 기대하는 건가. 영은 멀리서 보면 그냥 먼지 같아 보일 정도의 유리조각들을 쓸어내리며 실소를 터뜨렸다. 나도 누군가 이렇게 멀리 흩어져버린 마음을 하나로 모아주었으면 좋겠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밟으면 아프니까..

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06

그녀에게서는 늘 옅은 담배냄새가 났다. 그러나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향수 같기도 했다. 매캐하지만 또렷하고, 깔끔했다. 


영은 그녀에게 담배를 피우느냐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얼마 전까지는 비흡연자였으나 새로 이사한 집, 이직한 직장, 그녀 자신이 가는 어느 곳이든 누군가 담배를 피워대는 통에 자신에게서도 늘 담배냄새가 나게 되었고 그럴 바에는 그냥 자신도 흡연자가 되는 것이 오히려 덜 억울할 것 같아 담배를 피우게 되었다고 말했다.


묘하게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그녀의 말에 적당히 동조하며 그 사람들-장소를 가리지 않고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이 원망스럽지 않은지 물었다. 그녀는 잠깐 생각하는 듯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 번쯤은 피워보고 싶었어요.


그녀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어 만지작거리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대 피우고 오겠다며 외투를 챙겨 자리를 나섰다. 영은 고개를 흔들 때 어깨를 지나치던 그녀의 단정한 머리칼을 생각하느라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어느새 문 밖에 서 있는 그녀의 뒷모습만 보게 되었다. 그녀에게서 퍼져나가 차가운 공기와 만나 흩어지는 담배연기가 그녀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나도 한번 피워볼까.


조금은 우스운 생각에, 영은 조용히 웃음을 터뜨렸다.



영시리즈는 틈날 때마다 하나씩 써두었던 아주 짧은... 글이다.

짧은 글의 주인공인 영은 0에서 비롯되었다.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어떠한 존재로서 존재하는 어떤 것... 인 셈이다. (무슨 말인지 아시는 분?)

영은 앞으로 어떤 일들을 겪으며 생각의 품을 넓혀나갈까요?

또 얼마나 상처받게 될까요?

또 어떤 방법으로 그걸 딛고 일어나게 될까요?

너와 나 그리고 영의 안녕을 빌며 이번주 글을 발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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