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을 벗어던지고 나로서 존재하기
사람들은 저마다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가면은 원시적인 자아를 가리고 사회적인 자아로서 존재하게 도와주는 유용한 도구다. 고등학교에서 기간제 영어 교사로 근무할 때 고맙게도 학생 및 동료 선생님들은 날 살갑게 대해주었다. 학교에 몇 없는 젊은 남선생이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활력 넘치고 패기 있는 모습이 다른 선생님들과 비교된다나 뭐라나. 부장님 이하 사-오십 대밖에 없던 부서에 스물 여덟살 먹은 파릇한 막내가 들어오니 남녀 불문하고 나를 반겨주었다. 참 감사하다. 젊은 게 좋구나 싶었다.
교사 시절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학교에서 보인 내 모습 중 50% 정도만 원래 내 모습이라는 게 문제다. 아침 일찍 매우 말끔한 차림으로 출근해서 책상을 정돈하고 꼼꼼하게 수업 준비를 하며 학생들 고민에는 진심으로 공감하는 듯한 내 행동들은 모두 연기다. 집에 혼자 있을 때 원시적인 내 모습은 넝마 같은 옷차림에(여름엔 그조차 입지 않고 있을 때도 있다.) 책상은 너저분하고 11시까지 늦잠을 자기 일쑤이다. 친한 친구 고민에 공감 보다는 이해를 먼저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이른바 T형 인간임은 덤이다.
이렇듯 교사인 나와 원초적 나는 정말 다른 사람이었다. 둘 사이 간극 때문에 당시엔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둘 사이 간극을 좁히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사로서의 나를 원초적 자아 수준으로 끌어 내렸을 땐 그 사회에 수용되지 못할 두려움이 컸다. 반대로 원초적 자아가 당시 교사로서의 자아에 가까워지려 정진하자니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노력한다고 해도 딱히 교사인 내 모습이 인간으로서 멋있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다 먹고 살자고 그럴듯한 선생님의 행동 양식을 답습했던 것 같다. 이렇듯 가면이 두꺼워 질 수록 자아는 괴로워지기 마련이다.
그뿐만 아니라 가면은 날 외로워지게 한다. 50%나 진실하지 못한 모습으로 학생, 동료 교사들과 관계를 맺은 들 그 관계가 진실할 수 있을까?
‘선생님 강의는 역시 연륜이 돋보이는 것 같아요 (사실 더럽게 못 가르치고 지루함).’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선생님에게 말해줘(사실 고2쯤 됐으면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했으면 좋겠어. 내가 네 감정 쓰레기통은 아니잖아)’
감당하지 못할 가면으로 원초적인 자아는 더욱 억눌렸다. 수용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에 가면을 쓰면 쓸 수록 진실한 내 모습과는 멀어졌다. 충만한 교감이 아닌 위선과 허례허식이 관계를 채우면서 더 외로워지고 함께 있는 자리가 불편해졌다. 집에 돌아오면 가면을 벗어 던지고 긴장이 풀려 해방감을 맛보았다. 교사로인 나로 존재하는 시간이 불편했고, 관계도 엉망이었다. 그래서인지 교사 시절 연을 맺었던 사람들 중 현재까지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의든 타의든.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7~8년간 관계와 나 자신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하며 타협점을 찾아나갔다. 사회적으로 수용되면서도 원시적 자아가 외롭지 않은 지점 말이다. 그 과정은 ‘통합된 나’를 구축하는 과정이었다. 직장 내에서, 가족들과, 여자 친구와, 친구들과 있을 때 존재하는 내 모습들에 일관성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3년 전 여름, 친한 친구 A와 둘이 술을 마시던 중이었다. A는 여자 친구의 전화를 받고는 내 눈치를 살폈다. 난 놓치지 않고 ‘괜찮아 오셔도 돼~’ 라며 전화기에 들리게 끔 소리 냈고, 지금은 결혼하여 제수씨가 된 그녀가 동석했다. 그리고 당황하면서도 체념한 듯한 웃음을 보이며 A는 이렇게 말했다. “아 이렇게 세계관 겹치는 거 너무 싫은데…(웃음)” 그 표현이 너무 인상 깊어서 아직도 기억이 난다. 세계관이 겹친다니. A의 말에 따르면 내 세계관은 통합되어 하나만 존재한다.
통합된 나로서 존재하면 사람들과 있을 때 긴장이 거의 없다. 세계관이 겹칠 걱정이 없으니 그냥 ‘나’로서 존재하면 된다. 물론 내 모든 모습을 보여주기는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연기하지는 않는다. 가식과 연기의 가면이 아니라, 필터링의 가면이다. 전자가 다른 자아를 굳이 보여주는 것이라면, 후자는 본래의 자아를 굳이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혼자 운전할 때 내 생명을 위협하는 난폭 운전자를 보면 화가 나며 “저런 새끼들은 언제 사고 나서 뒤졌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어쩔 땐 입 밖으로도 나온다. 원초적인 순도 100% 내 모습이다. 그렇지만 직장 동료와 함께 차를 탔을 땐 굳이 그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 내 모습을 필터링한다. 만약 거짓 가면을 썼다면 굳이 이런 말을 했을 것 같다. ‘저 분이 많이 급한가 보네요’ 내지는 ‘조심 좀 하시지’와 같은 도덕책 대사들 말이다. 그런 말은 하지 못한다. 원초적 나는 꿈에서라도 절대 할 리 없지만 교사 이수진은 했을 법하다. 필터링이라도 하는 이유는 사회적 자아의 위신 때문이기도 한 데, 더 중요한 건 필터링이 상대방에 대한 배려 이기 때문이다. 상대는 내 원초적인 모습을 굳이 보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라 할 지라도 인간 대 인간으로, 진실하게 관계 맺고 싶다면 필터링 가면조차도 점점 옅게 만든다. 상대와 내가 함께 진실한 자아로서 관계 맺을 수 있도록 초대하는 과정이다. 물론 이 과정을 어색해 할 법한 사람에겐 권하지도 않는다. 아주 천천히 상대를 파악해 가며 마음을 열도록 내가 먼저 진실한 모습을 보여준다. 마음 잘 맞는 직장 동료들과도 이런 방식으로 진실하고 깊은 관계를 구축해 나갔다. 회사가 끝나고, 원한다면 주말에도 어울려 시간 보낼 수 있는 돈독한 관계가 되었다. 학교에서는 꿈도 못 꾸었을 그런 관계이다.
연인과도 마찬가지다. “파스타는 낯 간지럽고요, 술국에 소주나 마시면서 진득하게 얘기나 해봅시다.”로 시작되는 소개팅이 성공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지만, 운 좋게 연인이 되어 관계를 지속해 나가면 깊은 관계로 쉽게 발전할 수 있었다. 여자 친구가 원한다면 데이트 중에 친구가 합석하는 것도 거리낌이 없다. 친구들과 내 여자 친구가 나에 대해 이야기 하는 모습이 마냥 즐겁다. 통합된 나로서만 존재한다면 폭넓게 다양한 인간관계를 구축하기엔 적합하지 않다. 그렇지만 소수의 사람들과 심도 있는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데에는 이만한 게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행복하다. 굳이 많은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에너지를 쓸 필요 없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쓸 수 있어서 더욱 보람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