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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남북녀 Mar 06. 2024

언니에 대하여

언니라고 말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다. 이모라면 모를까. 눈가에 깊은 주름이 세 줄 보인다. 붉은 입술에 하얀 얼굴, 쌍꺼풀진 눈. 나이와 상관없는 미인형 얼굴이다. 손질이 잘 된 단발머리에 꾹 다문 입매. 까다롭겠는데 긴장한다. 아, 너야 오늘 온다는 애가. 사투리 섞인 친근한 말투가 예상을 깬다.

 

머리가 희끗한 사장과 젊다고 말할 수 없는 언니는 오랜 인연이다. 언니가 고향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첫 직장에서 만난 사이다. 어릴 때부터 모아 온 돈으로 언니는 직장을 그만두고 작은 가게를 개업한다. 그 가게에서 동업자 비슷한 투자자를 만났는데 어찌어찌하여 평생 모은 돈과 가게까지 다 잃어버렸다는 이야기. 언니에게 남은 건 인간에 대한 불신과 지병을 얻은 몸과 병환을 앓는 어머니다. 건너 건너 사정을 알게 된 머리 희끗한 사장이 언니에게 일하라고 해서 다시 직장인이 됐다. 사장과 언니와 아르바이트생으로 이루어지는 작은 회사

 

이런 날에는 순댓국이 딱인데. 요 앞 시장에 맛있는 데 있어.

순대는 먹으나 물에 빠진 순대는 피하고 동물의 살도 반갑지 않을 때다. 뭐 순댓국 정도야, 언니를 따라나선다. 비 내린 후 가을 공기가 서늘하다. 아줌마 내장 듬뿍 이요, 자리에 앉으며 언니가 말한다. 안면이 있는 듯 보이는 아줌마가 웃으며 알았다고 대답한다. 미끌미끌한 것이 가득 든 커다란 그릇이 내 앞에 놓인다. 너도 내장 좋아하지? 전에 있는 혜진이도 여기 순댓국 정말 좋아했어. 침을 꿀꺽 삼키고 숟가락에 올려지는 것들을 입에 넣는다. 처음 먹어보는 식감과 냄새에 맛있네요, 대답한다. 그치? 내가 몸만 건강하다면 두 그릇도 먹었을 거야. 언니는 젓가락으로 자신의 국그릇을 휘휘 젖는다. 맛만 보는 정도로 건더기를 몇 개 먹고 나머지는 모두 내 그릇에 넣는다. 많이 먹어, 네 나이는 한창 먹을 때야.

 

퇴근 후 언니와 치즈가 들어가는 부대찌개집에 들어간다. 햄 사리와 라면사리를 추가한 이 인분에 밥 없이 건더기만 먼저 먹는다. 언니의 기쁨은 볶음밥이다. 손 데지 않은 밥 두 공기를 남은 국물에 넣고 커다란 주걱으로 볶는다. 맛있겠다. 언니의 눈이 반짝인다. 신장이 안 좋은 언니는 이미 숟가락을 놓은 뒤다. 밥 한 공기 더 달라고 할까? 아니에요, 언니. 진짜 배불러요. 뭐가 불러 얼마나 먹었다고. 언니는 침을 삼키며 남겨진 음식을 바라본다.

 

주말에 동창들 만났는데 찜닭 먹었거든. 진짜 맛있어. 너 먹어 봤어?

그 시절 유행하던 찜닭집에 간다. 찜 닭 한 마리를 밥 없이 먹은 후 볶음밥 시간. 언제나 그러듯이 언니는 오래전에 젓가락을 놓았다. 부지런히 닭고기와 감자와 당면을 먹은 뒤 언니가 남은 재료에 볶은 밥까지 먹는다. 내 배가 부른 것 같아, 언니는 흐뭇하게 밥 먹는 나를 바라본다. 밥 한 공기 더 달라고 할까.

 

신장에 새로운 문제가 생겨 먹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는 의사의 권고를 받은 후, 언니는 엄마가 죽을 싸줬다며 점심시간에 나 혼자 먹을 음식을 배달하라고 한다. 그렇잖아도 과식이 힘든 참에 잘 됐다 싶다. 점심을 주문하지 않고 휴게실에서 쉴 계획을 세운다. 사장이 사무실을 나가고 점심은 언제 와 언니가 묻는다. 속이 안 좋아서 안 먹으려고요. 내 말을 듣는 언니의 얼굴이 심상치 않다. 몸도 안 좋은데 남까지 신경 써야 하는 사람의 짜증이 묻어난다. 젊은 애가 먹어야지, 안 시키면 어떻게 해. 괜찮아요, 배 안 고파요. 언니는 빠르게 일어나 잘게 자른 당근이 보이는 야채죽을 그릇에 옮겨 담는다. 엄마가 만들었는데 맛이 없을 수도 있어, 조금이라도 먹어. 언니는 막무가내로 내 손에 그릇을 쥐여준다. 남의 배고픔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언니는 동창회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고 머리가 희끗한 사장은 이참에 사업을 접겠다고 한다. 일하다가 오며 가며 만난 위 층 사무실 대장 언니가 나와 일하라고 한다. 면접 보기도 귀찮은데 다행이다. 이 층으로 첫 출근하는 날, 테이블 위에 커다란 케이크가 놓였다. 중간 사이즈의 세 배쯤일까, 텔레비전에서만 봤지 저렇게 큰 케이크는 처음이다. 일층 언니가 너보다 일찍 왔어. 케이크 들고서 사장님이랑 다른 사람들한테 다 인사 가고 갔다, 너 잘 봐달라고. 이층 사무실은 일하는 직원만 열 명이 넘어가는 나름 체계가 있는 곳이다. 앞에 나서서 말을 해야 할 때면 얼굴이 붉어지는 사람인데 별일이네, 자신을 위해서는 절대 하지 않을 일인데. 아마 언니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저 녀석이 가서 요령도 부리지도 못할 테니 나라도 해야지,라고.

 

결혼식 날 도와줄래? 언니는 결혼식을 앞두고 지방 도시로 옮긴다. 결혼식 하루 전 날 언니 집에 도착한다. 사십 평대 넓은 아파트다. 널찍한 방 한 칸을 내주어 구석에 가방을 놓는다. 저녁 식사 겸 언니와 남편분의 동창 모임. 지글지글 타는 고기, 술, 각종 반찬. 언니는 친구들의 축하 말을 듣고 따라주는 술을 마시느라 바쁘다. 언니의 얼굴은 발그레해지고 남편 될 분이 그런 언니를 보며 미소 짓는다.


중형차에 달린 꽃무더기와 웃음 가득한 사진들. 옷을 갈아입으러 가는 언니에게 이제 간다고 인사를 한다. 이거, 언니가 봉투를 내민다. 깜짝 놀란다. 생각지도 못한 것이 내 앞에 있다. 아니야, 괜찮아. 손을 내젓는다. 얼른 받아, 받는 거야. 자신을 신경 쓰게 하지 말라는 언니의 익숙한 신경질적인 말투. 언니의 기세에 못이 겨 봉투를 받는다. 의외의 수입에 어쩔 줄 모른다. 푸른 지폐 속에 내 마음이 갇히는 것 같다.

 

신혼여행 후 안부전화가 오가고 거리가 멀어 연락은 끊긴다. 이 층 사무실에서는 음식을 더 먹으라고 권하는 사람이 없어 내 몸은 예전으로 돌아온다. 가끔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뻐졌다는 말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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