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먹고 싶어, 뭐 살래라는 말을 들으면 입을 꾹 다물었다. 눈만 깜빡이며 그 말을 한 상대방을 가만히 쳐다봤는데 단번에 어떤 것을 결정하기에는 시간이 짧기도 했고 무언가를 먹고 싶다거나 사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없기도 했다. 순하다는 말을 듣는 조용한 아이였던 것으로 기억하나 영역을 침범당하는 것은 싫어해 고집은 상당했는데 무엇을 가지고 싶다거나 사고 싶은 욕구보다는 침해받는 것들에 예민한 방어적인 성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성격은 성장하며 순화된 부분도 있으나 지금도 여전히 남아 육아에 영향을 미치는데 육아를 하면서는 ‘최고’보다는 ‘해’를 생각한다. 어느 어린이집이 아이에게 덜 해로울까. 고집을 꺾는 게 덜 해로울까, 지켜주는 게 덜 해로울까. 영상을 언제부터 보여주는 게 아이에게 덜 해로울까
이런 고민이 도리스 레싱에게도 있었을까. 도리스 레싱은 어린 시절 엄마와의 경험으로 아이들에게 자신이 없는 게 덜 해로울 거라(나을 거라) 여긴다.
“자신의 어린 시절 경험 때문에 엄마라는 존재가 사라져야 아이들이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나의 사랑스러운 방해자> P140
“스물한 살의 도리스는 자신의 어머니와 운명을 공유해야 한다는 위험한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환상 속에서 그녀는 침착하고 따뜻한 양육자였지만, 두려움 속에서 그녀는 통제하고(제멋대로 하고) 괴로워하며 아이의 정신적인 건강을 해치는 존재였다.”<나의 사랑스러운 방해자> p155
스물셋의 도리스 레싱은 세 살짜리 아들, 한 살짜리 딸을 두고 인종차별적인 정책(‘컬러바 정책’)에 맞서기 위해 아이들을 떠난다. 레싱은 모성은 대체 가능하다는 의견을 작품 속에서 여러 번 피력했다는데 단편 <19호실로 가다>에서는 수전이라는 가정주부가 네 아이를 맡겨 놓을 사람을 구한 후에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이 그려진다.
“더 이상 살아갈 기운이 없다는 이유로 아이들을 떠날 생각이면서 이렇게 앉아 아이들 걱정을 하다니, 이렇게 위선적일 수가.”<19호실로 가다> p335
수전은 지성이 뛰어난 여성이었기에 결혼도 육아도 남편의 바람까지도 합리적으로 생각한다. 수전은 어느 일에서도 감정의 동요로 일어나는 쓸데없는 소란은 피우지 않는다. 나이 어린 쌍둥이까지 학교에 들어가며 기대하던 자유로운 시간이 수전에게 주어졌을 때 수전은 자신의 집 안에 적이 있다는 생각에 공황상태에 빠져든다. 드문드문 악마 비슷한 형상을 보기도 하면서. 수전의 적은 수전의 내면 깊은 곳 이제까지 경시해 온 감정의 응축이리라, 독자인 나는 생각하나 수전은 직면하기보다는 생의 의지를 잃어간다. <19호실로 가다>는 부족할 게 없는 가정생활도 여성에게는 억압이 될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갖고 있기도 하나 감정을 배제한 채 합리적으로만 살아가는 이의 황량함이 엿보이기도 한다.
도리스 레싱은 두 번째 결혼에서 세 번째 아이를 낳았고 남편과는 이혼하나 피터라는 세 번째 아이는 떠나지 않는다. 피터는 청소년기에 정신병이 발병하며 도리스 레싱과 평생 함께였다. 피터는 2013년 말 67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도리스 레싱도 아들 사망 몇 주후 건강이 악화되며 세상을 떠난다.
엄마가 있는 것이 아이에게 덜 해로울까, 없는 것이 덜 해로울까. 모성은 대체 가능한가
인간을 유전자의 복제 욕구를 수행하는 생존 기계로 보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 따르면 난자가 정자보다 크기 때문에 암컷은 착취당하는 성이다. 암컷은 크고 영양소가 풍부한 난자로 처음부터 수컷보다 많은 투자를 하게 된다. 체내에 태아를 키우고 낳고 젖을 물리고 양육과 보호를 부담하며 도망갈 기회가 없는 암컷에 비해 수컷은 쉽게 도망갈 기회를 얻는다. 교미를 하지 않고 생식 세포를 물속에 방출하는 어류에서는 정자가 먼저 방출되면 흩어져 버리기 때문에 암컷의 크고 무거운 난자가 방출되기를 기다렸다가 수컷이 정자를 뿌리게 된다. 이때 암컷은 도망갈 기회를 얻는데, 새나 포유류와 달리 물속에서는 수컷의 자식 돌보기가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도망갈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줄리 필립스 <나의 사랑스러운 방해자>
도리스 레싱 <19호실로 가다>
리처드 도킨슨 <이기적 유전자>